정보취합과 의사결정. 인생의 항로를 결정짓는 두 가지 키라고 했다. 자수성가와 억대 연봉을 필두로 며칠 만에 수만 명의 구독자를 끌어모은 어느 유튜버는 이것들과 관련 있는 책을 추천했고, 절판되었던 책은 다시 인쇄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늘어난 수요에는 내 결제내역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요 며칠 잠들기 전이나 할 일 없이 심심할 때 침대에 기대앉아 느리게, 이 책을 읽곤 한다. 오랫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사람의 뇌는 점점 무질서해진다고 하니 마치 방청소를 하는 것처럼 뇌도 주기적으로 정리해주어야 하고, 여자와 남자 두 종류의 인간이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쳐 어떤 본능과 심리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아두면 좋고…….
대학 시절 출석할 맛이 나던 강의들은 대개 교양과목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글쓰기나 혹은 토론하는 수업이 특히 좋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토론의 주제는 '안락사'였다. 그때 나는 안락사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토론하면서 가장 먼저 내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입론이었던가? 입론인지 뭔지 하는 글에서 나는 이런 말을 준비했고, 그대로 읽으면서 내 입장을 밝혔고, 교수님은 그런 내 비유를 칭찬하셨다.
점심을 먹기 위해 중국집에 가도 우리는 메뉴판을 보고 한참 생각합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아니면 짬뽕을 먹을까.' 짜장면을 골라놓고도 다시 생각합니다. '아니야, 짬뽕이 더 나을까?'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는 주제에 일상적인 비유를 들었는데, 이 비유가 참 와 닿았다고. 정말로 사람들은 점심 메뉴조차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한순간의 결정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던질지 말지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침대에 기대 앉아 책을 읽던 나는 출근해서 일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 꼭 정면으로 마주쳐야 하는 맥주집을 노려본다. 맥주는 배가 부르지만, 마시고 나면 졸릴 뿐이지만, 아무 것도 내게 남는 게 없지만, 그래도 생맥주의 시원한 이미지에 유혹당하는 날이 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4인석에 앉을까 고민하다 그냥 2인석에 앉아 맥주와 감자튀김을 시키고 혼자 홀짝이다 보면 서서히 취기가 돌면서 날마다 생각나는 것들이 조금씩 다른데, 오늘은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가 취기와 함께 떠올랐다. 워낙 짧은 소설이다보니 포털 사이트에 제목만 검색해도 전문이 나온다. 천천히 읽어본다. 처음 읽었던 그날처럼 여전히, 둘 다 저리게 불쌍하다. 헛똑똑이로 자라나 생각만 많은 무능한 남편과, 그런 남편더러 술을 권하는 '사회'라는 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겠냐는 아내.
집에 와서는 내가 정말 생맥주가 시원함이 고파서 그 맥주집에 들어섰던 건지 다시 생각해본다.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술을 마시면, 선택이 쉬워진다. 퇴근길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 택시를 탈까 싶지만 쉽지만은 않다. 버스비는 집까지 1350원, 택시비는 집까지 9200원. 8000원이면 참치김밥 두 줄, 아니면 복불고기덮밥.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이 귀찮다. 김밥 두 줄? 덮밥 하나? 다 X까라. 내가 지금 피곤하고 귀찮아. 횡단보도 앞에서 이미 대기 중인 택시 몇 대 중에 한 대를 잡아타고 내리면서 카드만 냈다 돌려받으면 깔끔하게 끝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술이 사람이라면 섭정을 시키는 거지. 나 대신 선택 좀 해. 나 대신 잠깐 인생 좀 살아.
의사결정만 잘 해도 인생이 성공가도를 달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2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항해에서 가장 힘든 건? 누가 뭐래도 짜장면과 짬뽕 중에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일. 결정은 못 하고 고민만 하다가 그냥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는 일. 누군가에겐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여전히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