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성프리맨 Feb 23. 2024

40,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

열아홉 걸음

신입시절. 첫 직장에서 만났던 사수는 28살이었다. 21살이었던 내게 28살의 상사란 까마득히 높은 존재였다. 경력으로도 물리적인 나이로도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수의 사수인 부서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서장도 나이가 어렸다고 느껴지지만 31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말 한마디 주고받는 것조차 어색하고 힘들었다. 분명 잘해주려고 건넨 말도 많았을 텐데 왜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던지.


하지만 그 사람의 위엔 경영진이 있었다. 지금 내 나이가 딱 당시의 경영진 나이대. 40대라는 건 20대의 나에겐 미지의 영역 그 자체였다.


당시 경영진의 삶은 재미없어 보였다. 날마다 마시는 술이 그나마 그들의 위안처럼 보이는 게 전부. 거기다 술자리에서는 지저분한 얘기뿐이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뭐가 그리 신나는지. 그 속에서 20대 초반의 난 없는 존재나 다를 바 없었다. 그때 다짐했던 걸까?


'40대에 난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호기로운 다짐을 했다. 저렇게 산다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영영 오지 않을 거 같던 40대가 찾아왔다. 물론 시간은 계속 흘러가니 이대로라면 50대, 60대도 찾아올 테지. 삶이 허락되는 순간까지는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아무튼 40대의 난 그때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까?


다행스럽지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들과 다른 삶을 선택한다는 건 장단점이 있다. 물론 내 생각에는 주로 장점만 있는 거 같지만 때때로 아쉬운 순간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삶은 귀찮고 불편함도 수반되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각자의 삶을 오롯이 혼자 살아내야 하지만 단체 생활을 했을 때의 편안함이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 아무튼 단체 생활을 벗어나 자립의 삶을 선택했을 때 당연히 감수해야 할 문제일 뿐이다.


'20대의 내게 비쳤던 40대 아저씨들의 삶을 왜 닮고 싶지 않았을까? 나름 경제적으로 성공한 삶은 분명했는데.'


경영진의 모습은 분명 경제적으로만 보면 성공한 삶에 가까웠다. 일반 직장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연봉과 이룩한 자산만 해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취미 생활로 몇천 정도는 쉽게 언제든 쓸 수 있는 재력. 필요하다면 더 썼을 수도 있겠지.


고작 두 자릿수 월급을 받던 21살 초라했던 내게 그들은 닿을 수 없는 높은 존재들이 맞았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부럽지가 않았다고? 왜?


함부로 판단해서 미안하지만 그들의 삶이 재미없어 보였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기준이다. 술을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이성과의 만남에 목을 매달지도 않던 내게 쾌락을 추구하는 삶 자체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과연 돈이 많아서 본인이 그렇게 살았다면 재미없다고 느꼈을까요?"


솔직히 경험해보진 않았으니 100% 그렇다고 반박은 못하겠다. 하지만 40여 년간 살아온 내 경험에 비춰봐서 90% 이상의 확신은 할 수 있을 거 같다.


'목회자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어려서부터 세뇌되듯 강요되었던 도덕적 기준이 문제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렇다고 내가 금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는데.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만의 기준이라는 건 분명 있었던 거 같다.


일말의 의구심을 가진 채 그 뒤로도 계속해서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직장의 형태나 환경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렇게 다양한 사람과 또 다른 내 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위라는 표현보다는 앞서 인생을 경험한 선배가 더 나으려나.


첫 직장 보다 조금씩 나은 직장으로 이동하면서 좀 더 본받을 만한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중에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사람도 분명 있었으니까. 그렇게 20대의 내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조금씩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꿈을 꾸며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대상이 나는 아니었다. 난 항상 핑계가 많았고 행복 추구는 현실이 안정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던 회사 생활 중 만났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쁜 회사 생활 중에도 본인의 공무원 입사 꿈을 위해 자투리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하던 선배.


많은 대화를 나누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사람을 만났던 건 내게 행운이었다. 맨날 핑계만 일삼고 안일하게 살아가던 내게 어느 날은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건네왔다.


"전 그대의 나이가 부럽습니다."

"네?"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부터 뭐라도 한다면 분명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어요. 지금 보기에 회사의 상사나 선배들이 표면적으로 부러워 보일 거예요. 하지만 노력하고 성장한다면 분명 그들보다 훨씬 행복하고 성공한 삶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아깝게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아요."


살면서 이런 충고를 해준 사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회사 생활 처음으로 느꼈던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 그 뒤로도 그 선배와는 별다른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은 많이 달랐고 선배도 공부하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겨줬던 그 선배와도 헤어짐의 순간이 찾아왔다. 물론 우리는 가벼운 인사만 나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내게 선배의 기억이 남아 있는 건 왜일까?


어쩌면 그때의 별거 아닌 것처럼 느꼈을지 모를 충고가 고마웠기 때문일까? 항상 그 선배의 말이 마음 한편에 남아있었다.


[노력과 성장]


맞아. 난 노력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40대의 오늘 하루도 노력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40대, 재능은 지켜나가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