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기억, 공소한 망각

85 걸음

by 고성프리맨

온전하지 못한 기억 탓에 이제는 과거 일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지금보다 기억력에 자신 있던 시절, 깜빡거리는 사람을 볼 때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다 집중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해서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집중을 하면 안 될게 어딨 다고 저래.'


어설픈 기억력을 자신하던 과거의 난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큰 사건에 대해선 여전히 기억하지만 가끔은 그 마저도 자신하기 힘들다. 정확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같이 있던 누군가와 대조를 하다 보면 미묘하게 어긋나 있음을 눈치채기도 한다.


처음엔 우겼다. 절대로 내 기억이 잘못될 리 없다며 그를 몰아세웠다. 그러다 제삼자가 나타났다. 우리 사이의 일을 멀찍이 지켜봤던 그의 시선이 좀 더 객관적이지 않을까 싶어 잠자코 들어봤다.


"그런 관계로 기억에 오류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십니까?"

"..."


인정하기 싫었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어설픈 기억력에 의존하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가진 주인공이 나왔던 [메멘토]라는 영화가 있다. 10분 정도의 기억력이 유지되기에 온몸에 기억해야 하는 메시지를 타투처럼 기록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화를 영화로만 받아들이던 시절엔 별다른 생각을 하진 않았다. 단순히 소재 정도로만 여기고 재미 여부를 논했던 게 전부였다.


어느 순간 주인공의 모습에 일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슬프게도 나의 어설픈 기억력을 자신할 수 없다고 믿는 순간 공감하게 되어버렸다. 나 또한 이제는 비슷한 목적으로 기록을 남길 때가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나의 기록에서조차 어느 정도의 왜곡은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싶은 방향과 모습으로 기록하지 말자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써지진 않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얼굴 본 지도 거진 10여 년이 흘러간 거 같은데. 시공간을 뛰어넘어 내게 도착한 메시지를 보는 순간 밀려졌던 시간이 한순간에 내 앞으로 당겨져 왔다.


순식간에 그와 있었던 모든 순간과 기억이 찰나의 순간, 내 머릿속에서 일깨워졌다. 별로 중요한 메시지도 아니었는데, 그의 짧은 문장이 잊고 지냈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냈다.


대사는 쓸까 말까 고민했지만 써보는 게 좀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기억할라나? 지나가는데 급생각나네.]


그리고 사진 한 장.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기억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느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함께 있었던 그리고 자주 술자리에서 얘기 나누곤 했던 그 일일 거라고.


예상은 적중했다. 짐짓 모르는 척, 나도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솔직히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망설였다.


[잘 사누? 저기가 어디지?]


그리고 대화는 끝났다. 무슨 헤어진 연인 사이에 [자니?]라고 보내는 문자도 아니면서, 느낌은 어째 흡사하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라기보다, 스스로의 기분에 취해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하필 같이 있었던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 좋기도 하고,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


한때는 붙어 지내는 시간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각자의 생활 속에서 어쩌다 문자 하나 보내는 사이로 만족하게 되어버렸으니까.


만나자고 하면 못 만날 것도 없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관심사가 너무나도 달라져 버렸고,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언제고 시간이 지나 서로가 유해지게 되는 그날이 온다면, 그쯤 해서 만나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이렇게 쓰고 나니, 마치 큰 싸움이라도 한 사이처럼 보이는데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생겨난 일이었고, 이런 일도 순리라면 순리로 받아들이겠다.




과거의 순간에 함께했던 이와 마주했을 때 슬픈 순간이 있다. 우리 사이에 나눌 얘기가 과거 얘기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다. 물론 그런 시간도 충분히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웃고 떠들고, 추억을 더듬어보고,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정적이 찾아온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화는 끊기고 온몸에 알 수 없는 기류가 간질거리게 만든다.


"저.."

"어.."

"먼저 말해."

"아냐. 먼저 말해."

"아니 뭐. 이제 다음에 볼까?"

"어 그러자. 시간도 많이 흘렀네."


즐거움의 총량이라도 존재하듯, 한껏 고양되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게 식어버렸다.


헤어지는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뒤돌아서서 길을 걸었다. 서로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각자의 시간 속으로 멀어져 갔다.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우리는 분명히 약속했다. 다음에 보기로.


그때까지는 엉성하게 또는 공소하게 잠시동안 우리에게 있었던 기억을 망각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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