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걸음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들은 무자비하게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1장에서 총을 소개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총을 쏴야 하며, 만약 쏘지 않을 것이라면 과감하게 없애버려야 한다. - 안톤 체호프
소설을 쓰다 보면, 복선이라는 걸 염두하게 될 때가 있다.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테니 대비해."라며 조금씩 알려주는 장치 같은 것?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뭔가 있을 법하게 계속 관심을 유도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걸로 밝혀지거나 그마저도 그냥 유야무야 사라져 버리는 경우는 [맥거핀]이라 부른다.
상반된 두 케이스를 잘 활용하는 건, 글을 쓸 때 요긴하게 쓰일 것이 분명하다. 물론 아직까지 잘 사용은 못하고 있다.
가끔 글이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소재를 강조해 "이 주제로 써내겠어."라고 쓰다가도 어느 순간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고 보니 [갈피]는 또 무슨 뜻이었지? 또가 아니라 아예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네.
사전에서 찾아보니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또는 그 틈. - 위키피디아]을 [갈피]라고 칭했다.
갈피를 못 잡는다는 건 책장의 장과 장 사이의 틈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봐도 되려나? 목차를 보며 몇 페이지에 원하는 내용이 있다를 찾아가듯, 글을 씀에 있어서도 쓰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갈피를 잘 잡아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도 갈피를 못 잡고,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내가 썼던 글을 보다 보니 소위 [군더더기]가 많았다.
이유는 뻔했다. 뭔가 다양하게 쓰고 싶었는데 막상 쓰다 보니 활용처를 놓쳤거나, 이어 나갈 방법을 까먹었다. 쓰는 순간엔, 체호프의 총처럼 반드시 "쏘고야 말겠어!"라고 마음먹었지만 어느 순간 맥거핀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의미 없이 등장했다 사라진 등장인물도 많아졌던 거구나.'
기세등등했던 등장과 달리, 어느새 뒷방 늙은이로 전락해 버린 인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나였다.
"그렇게 쓸 거면 날 뭐 하러 만들어 낸 거얏!"
"미안하다. 미안해. 다음번 글 쓰게 될 땐 반드시 의미 있는 것만 창조해 내볼게."
고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유의미한 창조의 과정이 필요하겠구나 정도는 확실히 느끼고 배웠다.
사실 현업에서 코딩할 때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만들고자 하는 기능의 스펙을 한번 살펴보고 필요해 보이는 요소들을 미리 정리하다 보면, 이것도 필요해 보이고 저것도 필요해 보이곤 했다. 시작하기에 앞서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부터 고려하다 보니, 일이 산으로 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일단 시작부터 빨리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조언을 듣곤 했는데.
"어허‼️ 모르는 소리! 알아서 맛있게 말아드릴 테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십쇼."라는 괴소리를 던졌었다. 그나마 결과물이라도 만들어내서 밥 벌어먹고 살았지 자칫하면 조기퇴직 당할 팔자였던 거 같다.
??? : "40대 초인데 지금 하는 거 없지 않아요? 조기퇴직 당한 거랑 뭔 차이인지?"
넘어가자.. 아픈 곳을 찔렸을 땐 빠른 화제전환만이 살길이다.
[40대도 특별하진 않아요.]라고 매거진의 제목을 붙였다. 이번 글을 쓰면 87 걸음이나 걷게 된다. 그런데 문득 뇌리를 스치는 의문 하나?
'지금 쓰는 글이랑 40대가 특별하지 않은 거랑 관련이 있나?'
뭐.. 갖다 붙이기에 따라서는 그냥 일상적인 내용과 고민하는 부분을 글로 쓰며, "40대도 이래요 하하. 뭐 특별하지 않죠?"라고 해도 될법한데.
그렇게 따지니까 굳이 매거진에 써 놓은 [40대]가 마음에 걸린다. 이러다 50대로 들어서면 [50대도 특별하진 않아요.]라고 매거진 제목만 바꾸고 다시 글 쓰면 되려나?
[40대]라는 키워드가 주는 키워드로 인해 유입된 독자가 있을 텐데, 막상 읽다 보면 "??? 대체 40대와 관련된 이야기는 언제 함?"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 싶었다.
"40대라는 키워드.. 맥거핀인가요? 아니면 어그로??"
"화자인 제가 40대에 진입했고, 그냥 그 나이대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여러 가지를 잡탕처럼 쓰고 있구나라고 봐주시면 안 될까요?"
어찌 됐건 오늘 글에도 [40대]라는 키워드가 여러 번 등장했으니 이 정도면 목표는 달성된 것도 같은데?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진짜로 40대라는 시간적 의미만 부여됐을 뿐 특별함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 취지에서라면 매거진의 제목이 안 어울리는 건 아닌 거 같다.
그래도 희망하는 게 하나 있다면, 현재의 내가 40대 중후반이 될 미래의 나에게 [체호프의 총] 하나쯤 선물해보고 싶다.
"뭔데요?"
"특별하지 않은 건데 눈치 못 채셨어요?"
"... 괴소리(괴상한 소리의 줄임말이지, 욕을 쓰는 것이 아님) 그만하고."
그건 바로.
글이다.
"에엣??"
"글로 쓴 대로 이루어질 지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암시와 예언을 동시에 걸었다. 내가 쓰고 있는 글쓰기 활동이 부디 [체호프의 총]처럼 제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다. 어쨌건 등장시킨 이상, "최소한 한 발쯤은 발포해 봐야 하지 않겠어?"라며 패기를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