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의 망령이 되어버렸다.

89 걸음

by 고성프리맨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도 여지없이 아이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말았다.


발단은 손가락을 입으로 빠는 행위 때문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쉬이 고쳐지질 않는다. 어르기도 해 보고 다그치기도 해 보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봤건만 나아지질 않는다.


반쯤 자포자기 한채 가만둬보기도 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다 보면 숨어 있던 [화]가 솟구치면서 잔소리를 하고야 마는 것이다.


좋은 뜻을 가지고 꺼낸 얘기니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잔소리를 하고 나면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듣는 아이도 괴롭겠지만 쏟아내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이엔 깊은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감정의 골이라는 게 생겨나 버리는 거려나?



기억이 전부 나는 건 아니지만 과거의 날 떠올려 봤다. 동나이대에 난 뭘 하고 있었더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주눅 들어 있고, 죄인처럼 풀 죽어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딘가 낯이 익은 모습인데?


내게 혼나는 아이의 모습과 어쩐지 닮아 있었다.


'떠올라 버렸어.'


'혹시나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내가 겪은 이 고통을 똑같이 전담시키지 않겠어.'라던 다짐도 생각났다. 하지만 현실 속 난 내가 겪던 그 모습 그대로(이유는 다를지 몰라도) 누군가를 주눅 들게 만들어 버렸다.


잔뜩 풀이 죽은 아이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짠해 보였다. 보듬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잔소리를 쏟아붓고, 화를 낼 때는 언제고 갑자기 착한 아빠라도 되려고?


멈칫. 아이의 멈칫거림이 느껴졌다. 그래도 다가가야 해. 나는 너에게 한 발을 내딛고야 말겠어.


결국 사과를 하고야 말았다. 아이의 행동과 상관없이 언행을 함부로 한 죗값을 치르고 싶었다. 고해성사와도 같은 과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일방적인 나의 사과가 강요되고 있었다. 아이는 마지못해 받아들였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오늘의 일 또한 상처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려나.




'잔소리 듣는 건 끔찍해. 정말 끔찍하다고.'


학창 시절 부모님, 그중에서도 아버지에게 듣는 가시 돋친 말을 들을 때면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그런 곳에서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은 다가왔다. 너무 기뻤다.


'더 이상 듣기 싫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병약해진 몸으로는 더 이상 내게 잔소리를 쏟아 낼 힘도 없던 그였지만, 이제는 정말로 두 번 다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어째서인지 마냥 시원하지만은 않았다.


평생을 두고 그토록 신물 나게 생각하던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어째서 완전한 행복감이 들지 않는 것인지.


문득 손주와 마주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돌아다닐 정도는 되던 몸 상태였어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손주와 만날 수 있었다.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다. 그 자리에 있던 세명중 유일하게 나만 기억하는 일.


아파서 벽에 기대어 힘겹게 숨을 내쉬던 아버지의 곁에 아이가 기어 왔다. 그리고 손가락을 잡았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그런 손주의 행동을 바라보실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손가락을 잡았어."

"네."

"힘내라는 거냐?"


힘을 내고 싶으셨던 거려나. 제삼자가 되어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을 텐데 내 눈엔 그 모습이 오래도록 담겨 있었다.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아픈 몸이 되어서야 나의 아버지는 평생을 쏟아내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잔소리는 계승되어 이제는 내가 잔소리의 망령이 되어버렸다.




이대로라면 기력이 쇠해질 때쯤에서야 나 또한 잔소리의 망령에서 벗어나게 되려나?


그럴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결코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다.


다시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하면 좋지?


하지만 아까처럼 잔소리를 쏟아 붓기엔 왠지 짠해 보인다. 그리고 방금 전 떠오른 아버지 때문인지 잔소리하고 싶은 맘도 싹 사라져 버렸다.


'다시 또 시험에 드는구나..'


영원히 지속될 거 같은 시간도 결국 지나버린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고통은 늘 괴롭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참아내는 것이 맞는 거겠지?


정답은 모르겠다. 시험으로 치면 수많은 오답을 찍었다. 지긋지긋할 정도의 오답률.


내가 알고 있는 정답은 왜 이렇게 적은 걸까?


다시 또 아이를 바라봤다. 금단현상과도 비슷하게 손을 입에 가져가다 흠칫하고는 떼어내기를 반복한다. 싫은 소리를 듣는 건 아이에게도 괴로운 일이겠지.


우리는 어찌 됐건 이 시간을 버텨내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알고 있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어느 시점을 통과하고 나면, 지금 또한 과거 속 한 장면이 될 것이라는 걸.


기왕이면 과거로 변하는 순간이 좀 더 앞당겨졌으면 좋겠다. 이다음번 잔소리 거리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지금 눈앞의 난관이 빨리 잊히기를. 그리고 나의 잔소리 저주에서도 해방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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