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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아내가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낸 건 처음인데.’
“별 건 아니고.. 흠. 공인중개사 도전해 볼까 하는데.”
“부동산? 갑자기?”
평소 부동산에 관심도 없던 아내가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내다니. 의의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봤다.
“뭘 또 그렇게 보고 그래. 그냥..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 놓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혹시 또 알아? 나중에 쓸모가 생길 수도 있잖아.”
“자신 있어?”
잠시 뜸을 들인다.
“자신은 없지. 아직 뭘 알아보지 않았으니까. 근데 내가 원래 시험은 잘보댔거든. 한번 해볼게.”
“그래. 해보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하자 아내가 더 놀란 듯했다.
“정말? 나 그럼 수강신청 한다?”
“응.”
아내의 설레어하는 표정을 보고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쉽게 생각하고 내뱉는 말이 아님을 알기에 아내의 결정을 존중했다.
“지은아.”
“응?”
“이건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건데. 혹시 부동산 쪽으로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야?”
“음.. 그런 것도 있긴 하지. 그냥 내 주변 친구들만 봐도 결혼해서 집사고 괜찮게 살게 된 애들이 많더라고. 지금은 연락 잘 안 하지만 연주 알지?”
“아 몇 번 모임에서 봤었잖아.”
“걔 원래 그냥 평범하게 살았었거든. 아니다. 평범 이하?”
험담을 하려는 건가..
“남편을 잘 만났잖아. 그 이후 집도 마포 쪽 신축 아파트 분양받고 그 뒤로 집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잖아. 휴.. 그때 얼마나 배가 아프던지. 걔 능력으로 이룬 게 아니잖아.”
결국 친구가 잘 된 게 배 아픈 건가? 근데 연주라는 친구가 잘난 척이 심한 건 몇 번의 만남에서 느꼈었다. 남편도 어찌나 재수가 없던지. 술자리에서 본인이 다 계산하겠다고 하질 않나. 나서는 모습이 조금 꼴 보기 싫긴 했다.
“그때 느꼈지. 역시 우리나라는 부동산이구나.. 뭐 우리도 집 안 샀으면 지금 더 힘들게 살고 있긴 했을 거야. 근데 우리 집 팔고 어디 이사 갈 데도 없잖아. 공부를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한번 해봐야겠어.”
“그래. 기왕 하는 거 열심히 해. 우리 집 좀 부자로 만들어 주세요.”
“뭐야. 비웃는 거야?”
살짝 흘겨보는 아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내 모습에 아내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
문득 사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입은 재판매를 위해 도매처에서 직접 물건을 소매 또는 도매로 구매하는 걸 말한다. 최근 눈에 띄는 물건 중에 무지 티셔츠를 1+1+1+1+1으로 파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우연히 클릭해서 쌓인 리뷰 개수를 봤었는데 3천 개가 넘게 쌓여 있는 걸 보고 뜨악했었다. 티셔츠야 말로 레드오션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틈새를 찾아내 묶음으로 판매를 하는 걸 보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까맣게 잊고 지냈다.
최근 판매가 활발히 이뤄졌던 상품은 시즌성 상품인데 오르골 제품이었다. 어린이날과 맞물려 순식간에 몇 십 개 이상의 판매를 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상품이 잘 팔리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똑같은 제품을 파는 업체가 많아졌고 결국 그로 인해 재고가 부족해져서 더 이상 팔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판매를 하는 업체는 미리 사입을 해놨던 곳들만 가능했고 그 모습을 보자 엄청나게 배가 아팠다.
‘내가 조금만 더 용감했다면.. 아이템도 내가 먼저 발굴했는데.’
이렇게 생각 들자 다음번에 혹시라도 반응 좋은 상품이 생기면 미리 좀 사놔도 좋겠다 싶었다. 요즘은 남는 재고를 여러 중고 서비스 플랫폼에 미개봉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재고 소진에 자신은 있었고 그렇게 한 품목이라도 사입을 해보고 싶었다.
최근 판매가 가장 많이 이뤄진 상품을 찾아보니 어린이 학용품류가 있었다. 개별로 팔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만 묶음으로 패키지 구성해서 팔면 마진을 괜찮게 남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미리 사입을 하면 새롭게 재포장을 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 같다. 여기까지 정리가 되자 빨리 아내와 상의가 하고 싶었다. 때마침 산책 갔던 아내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여보! 여보! 기다렸잖아.”
“왜 이래?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내가 뭘 잘못해야 자기를 찾나?”
“푸핫. 장난 좀 쳤어. 왜?”
“내가 계획을 하나 세웠는데 들어봐 줘.”
10분 정도 시간을 소요해 열심히 종이에 써가며 아내에게 설명을 했다. 설명하는 내내 아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나도 모르게 눈치가 몸에 베였다. 40대 가장의 씁쓸한 모습이구나..
“으흠.. 얼마나 사려고? 근데 우리 집도 좁은데 옷방으로 쓰고 있는 곳 밖에 공간 없지 않아?”
“처음부터 많이 사는 건 좀 그렇고. 일단 100개 정도만 사서 세트 구성을 해볼까 하는데.”
“100개면 많은 거 아니야?”
“아니 봐봐. 몇 주간 팔린 것만 60개가 넘어. 그리고 Q&A에도 요구가 좀 있는데 세트로 구성해서 팔 생각 없냐는 문의도 많이 왔어.”
“그럼 구매비용이 얼마나 들려나? 몇백드는 거 아니야?”
“자.. 계산 좀 해볼게. 3,000원씩 6종류를 100개 구해하면.. 180만 원 정도? 그리고 묶음으로 판매하면 마진율을 한 30% 정도는 남길 수 있을 거 같거든. 뭐 간략히 계산해 보면 세트로 구성된 거 1개 판매하면 약 5,400원 정도 남게 돼. 그럼 54만 원 정도의 순수익이 발생한다는 결론이 나오네.”
“54만 원.. 뭐 180만 원 정도 투자해서 그 정도 벌 수 있으면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엄청나진 않네.”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액수도 아니긴 하다. 그래도 일단 사입에 대한 경험치를 올리기에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작은 성공이라도 경험해 봐야 그다음으로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만큼은 아내를 설득시켜서 해봐야겠어.
“오히려 리스크가 크지 않으니까 한번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포장부터 배송하는 건 내가 해볼게.”
“오빠. 그러고 보니 포장 비용이랑.. 배송비도 들어가잖아.”
아차. 그렇구나. 포장비랑 배송비를 고려 못했다. 아니지. 일단 배송비 정도는 상품 가격에 포함시켜도 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세트 구성으로 판매하는 곳이 있는지 혹시 있다면 가격 책정이 어떨지부터 한 번 알아봐야겠다.
“당신 말이 맞네. 일단 배송비는 상품 가격에 포함시키면 될 거 같은데. 혹시 내가 생각한 구성으로 판매하는 곳이 있는지를 좀 알아볼게.”
“응. 한번 잘 따져보고 판단해. 오빠가 해보겠다고 하면 반대할 생각은 없어. 솔직히 구매대행은 오빠가 혼자 다하고 있잖아. 성과도 내고 있고.”
“고마워.”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다행인 건 내가 생각한 세트 구성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없다는 거다. 조금 안 좋은 건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으니 내가 책정하는 가격이 중요하다. 추후 판매가 잘돼서 똑같은 구성으로 좀 더 저렴하게 판매하는 스토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행동해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하지 말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생겨난다. 괜히 안 해도 될 일을 돈과 시간을 써가며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아니야! 부정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일단 사입으로 물건을 받고 세트구성을 하면 시간이 2주 이상 걸린다. 그전에 미리 판매 테스트를 좀 해보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물건을 조금 늦게 배송해도 판매할 수 있을 방법이 분명 있을 거 같은데.’
그러다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 하나. 온라인 공구! 공부하면서 전에 들었던 내용인데 지역 맘카페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동구매 형태로 올려서 파는 형태가 생각났다. 물론 해본 적은 없었지만 합리적인 가격으로 잘 구성하면 성과가 나쁘지 않다고 했다. 선주문의 개념으로 미리 돈도 받을 수 있고 괜찮은 상품인지 테스트해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일단 이번 사입은 경험을 우선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여보! 잠깐만 와줄래?”
보통 맘카페는 인증 절차가 있다 보니 남자 아이디로 가입할 수 없는 곳이 많다. 아내가 가입해 놓은 동네 맘카페가 생각나 로그인을 부탁했다. 맘카페의 좌측 메뉴를 보니 [공동구매] 란이 보인다. 클릭을 해서 슬쩍 살펴보니 생각보다 많은 물품의 공동구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상품에 따라서는 저조한 판매율을 보이는 것도 많았다.
“맘카페에서 공동구매 글을 올려보려고.”
“아직 상품도 없는데 판다고?”
“어차피 구매대행이라는 게 상품 없이도 파는 구조긴 하잖아. 대신 가격적으로 좀 할인이 많이 되는 것처럼 꾸며서 미리 선입금을 받고 시간도 벌면 어떨까 싶어서. 그리고 배송대행지에서 항공운송으로 하면 시간 단축도 가능하긴 해. 돈은 좀 더 들겠지만.”
“음.. 괜찮을까? 그래 뭐 테스트해봐. 뭐 여기저기 다 찔러봐야지.”
중국 쇼핑몰에서 최대한 상품 이미지를 모았다. 그리고 패키지 구성하려는 형태에 맞는 이미지를 살짝 편집해 하나의 이미지로 합쳐놓았다. 최대한 중국어가 노출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제목을 정하고 내용을 간략히 작성 후 글을 올렸다.
‘이제 기다리면 되겠어.’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글을 올린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알림이 왔다.
[입정신청 없이 판매글을 올리셔서 경고드립니다. 올리신 판매글을 삭제 조치되었으며 입점을 원하실 경우 대행사 또는 직접 연락을 통해 절차를 진행부탁 드립니다.]
그냥 올려서 판매하는 게 아니었구나.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냥 구매대행 도전하듯 쉽게 생각했는데 맘카페는 입점을 해야 판매가 가능한 구조였고 수수료가 따로 발생하고 있었다. 맘카페에 입점 수수료와 판매 수수료를 지급하고 나면 생각보다 남는 게 별로 없지 않을까 싶어 맘카페는 제외시키기로 했다. 다른 공동구매 서비스를 찾긴 해야겠는데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모든 게 귀찮고 하기 싫다. 누가 대신해 주면 정말 좋을 텐데. 현타가 밀려온다.
“오빠. 뭐 해?”
“하아. 쉬운 게 없어.”
방금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래? 그래서 맘카페가 돈 버는구먼. 하.. 공짜가 없다 정말.”
“그러게. 뭔가 해보려고 하면 죄다 돈이야 돈.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한번 나도 좀 알아볼게. 기왕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썰어봐야 될 거 아니겠어? 판매할 수 있는 곳만 찾으면 되잖아.”
“그렇지. 근데 아무 데나 올리면 안 되긴 해. 어느 정도 유입량이 있는 곳이긴 해야 하는데..”
자본력 없이 해보려는 일에는 엄청난 수고가 들어간다. 결국 몸으로 때워야 한다. 무거운 물건을 들진 않지만 결국 손가락과 머리를 이용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돈을 벌 수 있다.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하나하나 매 맞아가며 배우는 중이다.
공동구매를 할 수 있는 다른 플랫폼이 있는지 찾아봤다. 생각보다 플랫폼은 많았다. 토스, 당근, 대행사, 개인쇼핑몰, 인스타그램, 기타. 여러 가지 플랫폼만의 장단점을 다 알아보기는 귀찮아 일단 무료로 올릴 수 있는 곳은 전부 올려 보기로 했다.
“수량을 쪼개서 테스트해볼까?”
“어떻게 하려고?”
“10개씩 쪼개서 다 신청해 보지 뭐. 해봐야 알 거 같아서.”
“그래. 근데 그래도 명색이 공구인데 10개면 너무 작은 거 아니야?”
“일단 해볼게.”
공동구매라고 하기에는 작은 숫자였지만 해보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어디 하나 얻어걸려라 하는 마음이 더 강하긴 했다. 플랫폼에 가입 후 판매금지 품목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읽고 맘카페에 올렸던 글과 동일하게 혹은 약간만 수정해 글을 올렸다. 장장 3시간에 걸쳐 작업을 마치고 나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아직 판매라고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흥분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내일의 일이 있으니 이젠 자러 가자.’
—
출근해서도 집에 와서도 며칠간 공구 현황을 살펴봤는데 생각보다 관심이 없었다.
‘유입이 되기는 하는 건가? 광고를 따로 해야 하나?’
고작 10개를 팔기 위해 광고를 태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렇게라도 시작한 게 어딘가 싶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다시 초조해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여러 커뮤니티 돌아다니며 댓글을 남겨볼까?’
평상시 꼴 보기 싫었던 광고성 댓글이 생각났다. 설마 저렇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런 행동을 내가 하려고 하다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살짝 자괴감이 들 뻔도 했다. 하지만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틈틈이 자주 돌아다니는 커뮤니티에 새 계정으로 열심히 홍보를 시작했다. 우연히 찾게 된 유튜브 채널이나 블로그에도 틈만 나면 댓글을 달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이런 내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올렸던 공동구매 선판매를 완료했다. 얼떨떨했다.
‘이게 진짜 되네?’
솔직히 댓글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자연 노출에 따라 판매가 이뤄진 건지는 모르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트래픽 분석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그 중요성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은아. 다 팔았어!”
“어! 정말? 어떻게 한 거야?”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아내는 새롭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오빠 대단하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평소에 그런 댓글이 많이 보여서 반신반의했는데. 혹시나 해서 해봤어. 며칠 동안 판매가 없으니까 마음이 조급해지더라고. 분명 조사할 때만 해도 수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상품 구성이었으니까.”
“잘했어! 그러면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해볼까?”
“계속 하긴 할 건데 생각보다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아. 생각보다 힘드네.”
“힘드니까 돈 벌 기회가 생기겠지. 그럼 나 알려줘. 내가 틈 날 때마다 도울테니까.”
카페도 출근하고 청소도 도와주고 이제는 공동구매까지 도와준다고 하는 아내. 전생에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아내를 만날 수 있게 된 걸까. 하지만 아내에게 너무 많은 부하를 줄 수는 없다. 차라리 내가 좀 더 노력해야 한다.
“아니야. 지금도 바쁘게 일하잖아. 내가 좀 더 하는 게 맞을 거 같아.”
“내가 일이 재밌어서 그래. 나도 몸 상해가면서 할 생각은 없어. 그냥 도울 수 있는 부분에서 조금씩 해보려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린 부부잖아. 언제든 얘기하라고. 난 오빠 편이니까.”
“고마워. 지은아.”
회사를 잃었지만 가족을 얻었다. 회사를 다녔어도 우리는 가족이고 부부였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관계는 무미건조해지고 있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서로 예민해졌고 싸우기 일쑤였다. 회사를 10년 이상 더 다닐 수 있었어도 분명 50대 정도 되었을 때 우리는 대화 없는 우울한 부부가 되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건강도 잃고 관계도 잃고 나면 그 인생이 과연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우리 모습이 썩 나쁘게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현실은 쪼들리지만 말이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생기고 있고 성과도 보인다. 하는 만큼 번다의 느낌도 조금씩 알 거 같다. 물론 너무 앞서가는 생각일 수는 있지만.
—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현금 흐름이 좋아졌다. 농산물 위탁판매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상품의 품질 대비 가성비가 높다고 생각해서 인지 점차 단골이 생겨났고 이를 발판으로 다른 업체의 상품도 입점시킬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매출이 증대되고 일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스캇을 도와 고시텔에서 하던 일은 몇 달 전에 그만뒀다. 스캇은 그간 꿈꾸던 F&B 사업을 위해 결국 고시텔 사업을 차례차례 전부 정리했다. 그나마 우리의 사정을 고려해 가장 마지막으로 순서를 미뤄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스캇 밑에서 일하며 우리 부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할 수 있었다. 기회는 남들이 쳐다보지 않거나 하찮게 여겨지는 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
청소와 사람을 상대하며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예전의 성격보다 강단 있게 변하게 되었다. 더 이상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함이 사라지자 확신에 찬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상대방의 신뢰도 얻게 되었다.
구매대행은 여전히 하고 있다. 공동구매 관련한 일이 커지며 접어도 되는 상황이지만 초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초심을 지켜갈 수 있는 습관이 필요했고 구매대행은 내게 그런 역할이 되어 주었다. 여전히 힘들고 고생스럽지만.
아내는 이제 제법 사장님 느낌이 난다. 오히려 나보다 더 사업 체질인 거 같다. 아르바이트로 다니던 영주의 카페를 결국 퇴직금과 대출금으로 인수했다.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던 거 같다. 영주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가야 할 일이 생겨 급하게 정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는데 우리에게 인수 제안을 먼저 꺼내줬고 이런저런 고민 끝에 인수하게 되었다. 기존의 카페 장사에 추가로 몇 가지 제빵 품목도 납품을 받아 판매를 시작했는데 세트 구성이 나름 괜찮아 쏠쏠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제는 구조조정 당했던 과거의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더 이상 회사에 속해 이리저리 치이며 살던 과거가 까마득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불과 2년도 채 안 되는 사이 많이 변했구나..’
회사를 다녔던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회사를 다녔었기에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있었다. 결혼도 할 수 있었고 생활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퇴사 후 나는 제2의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가끔은 병실에 누워 암울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미래라고는 한치도 내다볼 수 없었던 시기.
가장이라는 중압감 때문에 살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티고 이겨냈다. 우리 가족을 굶길 수는 없으니까. 내게 주어진 가장의 무게를 피하지 않고 현실을 당당히 마주했을 때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길은 조금씩 나를 행복이라는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언제나 내 곁에 있었지만 난 행복이 멀리 있다고만 생각했던 거였다. 항상 나중에 미래를 위해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미뤘던 것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포기하지 말자. 인생은 정말 긴 마라톤이다. 아직도 난 초보 사업가일 뿐이고 미래는 알 수 없다. 단지 퇴사를 두려워하는 그대들보다 조금 먼저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일 뿐이다. 두려워한다면 움직이면 된다. 나처럼 일이 닥치고 나서 하게 되면 고생이 많아질 뿐이다. 어차피 해야 될 고생이라면 피하지 말고 지금부터 조금씩 해나가길 바란다. 언젠가 그 고생은 분명 큰 성과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좀 더 상세하고 길게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적당한 거 같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때도 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고 있을 거라는 거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어떻게든 기어서라도 탈출을 시도하면 된다. 그것뿐이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진실.
그렇게 여전히 난 잘렸지만 겨우겨우 먹고는 사는 중이다.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 끝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