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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냄새에 이끌리듯 거실로 나가자 아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뭐야. 나 아직 괜찮네!’
없던 자신감이 마구 샘솟았다. 내친김에 뒤로 가서 백허그를 하려 하는 순간 아내가 휙 돌더니 막는다.
“그만!”
“엉?”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으이그. 또 또 이상한 생각 했지? 희수 어린이집에 다 데려다주고 오라고. 아침 차리고 있을 테니.”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맞는 말이라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아내가 기분 좋아 보이니 그거면 됐지 뭐.
“어? 여보 오늘부터 영주 씨 카페 출근 아니야?”
“아 그거 오늘부터가 아니고 다음 주부터야. 지금 일하는 알바생이 이번주까지 같이 한다고 해서.”
“아 그래. 오케이.”
희수를 데려다주고 돌아왔을 때는 거한 한상이 차려져 있었다. 늘 간단하고 가볍게만 먹던 아침이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린 거지?
“오늘 무슨 날이야?”
“맞춰볼래?”
“아.. 그런 거 하지 마. 나 기억력 안 좋은 거 알잖아.”
불안하다.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거나 짐작되는 게 없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고?”
나도 모르게 습관성 ‘미안해’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오래 살다 보니 나름 터득한 기싸움 방법이랄까. 시선을 밥과 반찬에 두고 수저를 들었다.
“잠깐만! 진짜 몰라?”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구나.’
최대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내를 쳐다봤다. 그런 내 표정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더니 한 마디 내뱉었다.
“바보 같은 표정은 넣어두고. 사실 뭐 특별한 날은 아니고. 드디어 퇴직금이 들어왔습니다!”
퇴직금! 퇴직금이라는 말에 눈과 귀가 동시에 번쩍 떠지는 기분이다. 현금에 목말러 있던 우리 집에 드디어 현금이 들어왔다! 하지만 여기서 너무 기뻐하면 큰일 난다. 엄연히 저 돈은 아내의 돈이라는 듯 조금은 무심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저 돈은 내게도 꼭 필요하다.
“고생 많았어. 그동안 일한 보상이네. 시원섭섭하겠어. 그래도 오래 다닌 직장이었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한편으로는 많이 속상해.”
“회사 그만둬서?”
“아니. 그냥 오래 일한 보상이 고작 이 정도 돈 밖에 안된다는 게. 내가 직장에 환상이 많았나 봐.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별 볼일 없는 데. 그리고 돈이 들어오니까 엄청 신나긴 했거든? 근데 따지고 보면 원래 내가 받아야 되는 돈을 늦게 받은 거뿐이잖아. 조삼모사가 따로 없더라고. 그래도 기분 내고 싶어서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아침이라도 든든히 먹고 싶어졌어. 설명 끝! 밥 먹자 오빠.”
“고생 많았어.”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은 너무 맛있었다. 말로는 본인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차려진 반찬을 보자마자 느꼈다. 전부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되어 있었으니까. 여전히 아내가 날 사랑하고 있구나가 느껴져 감사할 따름이다.
“근데 오빠. 어제 왜 여자들 헐벗은 사진 보고 있던 거야? 남자들은 원래 그래? 나이가 들어도 막 그런 거 보면 흥분되나 보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이게 참 뭐라고 해야 하지.”
설명을 하긴 해야 하는데 아내가 오해하는 부분부터 풀어줘야겠다. 물론 어제 만들었던 이미지 들에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다고는 못한다. 분명 나이가 들어도 시각적인 자극은 참기 힘들다.
“그래. 뭐 어제 내가 보고 있던 이미지들은 전부 AI 서비스로 만들어 낸 것들이었어. 물론 명령어를 내가 만들어내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욕구가 조금은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
여기서 슬쩍 아내를 한번 쳐다봤다.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그게 AI로 만든 거라고? 어떻게? 근데 원래 있던 그림처럼 자연스럽던데. 난 오빠가 애니 좋아하니까 이상한 야한 애니 보는 거라고 생각했어.”
“날 어떻게 보는 거야.”
“오빠를 오빠로 보지. 내가 같이 산 시간이 있는데 성향을 모르겠어?”
“이상한 말 그만하고. 암튼 밤에 머리나 식힐 겸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궁금해서 한번 해봤던 거야. 근데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더라고. 요즘 보니까 AI 이미지로 수익화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꽤나 많아 보이던데. 어쩌면 나도 경력 살려서 잘만 결합시키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런 걸로 돈도 번다고? 어떻게 버는 건데? 벌 수 있으면 해 봐.”
“나도 아직 자세하게는 몰라. 그냥 어제는 시험 삼아해 본 거였고. 이제 조금 시간을 들여서 방법을 찾아내볼까 해.”
“으음. 알겠어. 솔직히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닌데 왠지 컴퓨터로 하는 거면 오빠도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한번 포기하지 말고 해 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장인의 사고로만 생각하던 아내였는데 지금은 나보다도 훨씬 개방적인 생각과 의견을 내고 있다. 이런 모습에 적응이 다 되진 않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한 파트너처럼 느껴진다. 오늘 일과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AI 학습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
오늘은 좀 더 본격적으로 청소를 했던 날이었다. 장기 투숙했던 객실 청소여서 확실히 찌든 때가 있었다. 한쪽 벽면은 벽지가 뜯어져 있기도 하고 살짝 곰팡이 자국까지 올라와 있었다. 처음 보자마자 정신이 멍해져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아내가 일단 사진부터 찍으라고 해서 빠르게 정신을 차린 후 스캇에게 사진을 보냈다. 잠시 후 스캇에게 전화가 왔다.
“제프. 벽지는 신경 쓰지 말고 청소해 줄래요? 뜯어진 건 일단 제가 고객님에게 보상받을게요. 이런 일 생기면 앞으로는 꼭 체크해서 보상을 받아야 하니 다음에는 제프가 해주세요. 벽지는 창고에 가면 여분으로 사놓은 게 있는데 아마 혼자 도배하진 못할 테니.. 이건 제가 오늘 새벽에 할게요.”
‘도배도 셀프로 하는 거였어? 독하다 독해.’
“스캇. 도배도 직접 하고 있었어요?”
“원래 상태가 심각하면 동네 도배 아줌마 부르면 되는데. 아! 그러네. 제가 도배 아줌마한테 연락해 놓을게요. 그 정도는 해줄 거 같아요 서비스로. 일단 전화해 보고 얘기 줄게요.”
직접 도배를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하면 결국 도배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 이상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아내에게 얘기하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뭐 어때. 본인이 사장이잖아 알아서 하는 거지. 근데 난 스캇처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긴 해. 결국 비용 나가는 거 한 푼이라도 아끼는 게 좋은 거 아니야?”
“그런가? 그래도 돈도 많으면서 이런 것까지 아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글쎄. 근데 스캇이 부자된대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어쩌면 이런 행동이나 모습이 쌓여서 결국 지금처럼 된 거 아닐까. 원래 돈은 좀 독하게 모아야 한다잖아. 그리고 이참에 도배도 하게 되면 해보는 거지 뭐. 배워놓으면 다 쓸모가 있겠지.”
참 긍정적이다. 내 말에 호응에 주지 않는 아내를 보며 순간적으로 삐질 뻔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제프. 도배 아주머니가 1시간 뒤에 와서 해주시겠다네요. 사진 보고 나서 30분이면 끝낼 수 있을 거 같다시네요. 혹시 청소는 다 됐을까요?”
“네 이제 거의 다 끝났어요.”
“다행이네요. 도배지 붙이고 나면 하루 정도는 그냥 두라고 해서요. 청소 안 됐으면 다음날 부탁하려고 했는데. 빨리 해줘서 고마워요. 형수님한테도 감사하다고 얘기 전해주세요. 전 오늘 고시텔 못 들르니까 일 마무리 잘하고 들어가세요. 다음에 봐요.”
스캇은 굉장히 바빠 보인다. 그래도 도배를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니 다행이다. 청소를 끝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도배 사장님이 오셨다.
“안녕하세요. 못 보던 분이시네.”
“안녕하세요. 양대표님한테 전화받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잘 부탁해요. 제가 일정이 바빠서 혹시 방부터 알려주시겠어요?”
아주머니는 별다른 장비 없이 벽지만 가져왔다. 사이즈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벽에 댔을 때 거의 딱 맞았다.
“신기하네요. 여기 사이즈 다 알고 계세요?”
“네. 제가 전부 도배 맡아서 했으니까요. 유지보수도 정기적으로 해주고 있어요. 양대표가 일을 참 잘하긴 해요 그렇죠? 아주 싹싹하고 돈도 잘 챙겨줘요.”
아주머니가 작업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방 밖으로 나왔다.
“요즘은 풀칠 안 하고 바로 붙이는구나.”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대답을 해주신다.
“요즘 얼마나 좋은데요. 근데 이렇게 보수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풀칠하고 있어요. 일단 제 방식이 나름 있어요.”
잠시 벽지를 붙이고 밀다가 마무리로 튀어나온 부분을 정리하더니 도배를 끝마쳤다. 살짝 벽지 색깔이 차이가 있었지만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잘 티가 나진 않았다. 벽지 하나만 새로 붙였는데도 거짓말 살짝 보태서 새집 같은 느낌이다.
“엄청 깔끔한데요.”
“하하. 그럼 저 갈게요. 다음에 또 인사 나눕시다.”
벽지 작업을 끝마치고 쿨하게 퇴장하셨다. 한편으로는 고시텔 운영을 맡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그냥 도배는 남이 해주는 일로만 생각했고 객실에 대한 관리도 누군가가 해주는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금은 그 누군가의 역할을 하게 되어서 더 신경을 쓰는 것도 있겠지만 몰랐던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배우는 느낌이 든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은 건지..’
일을 하는 동안 최대한 많은 노하우를 몸소 경험하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몸 쓰는 일은 여전히 피하고 싶어 지지만 말이다. 청소만 하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다 끝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이상하게 오후 시간만 되면 하루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회사 다닐 때를 생각하면 기분이 참 묘하다. 물론 메여 있는 상황은 비슷하지만 자유도 면에서 그리고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 있어서 궁극적인 차이가 느껴진다.
“오빠. 근데 우리 퇴직금으로 뭘 하긴 해야 하지 않아?”
“그건 지은이가 고생해서 번 돈이잖아.”
“그건 맞지. 근데 나 혼자서는 어디다 어떻게 이 돈을 이용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서 말이야. 물론 뭐 엄청 큰돈도 아니지만.”
“합의금을 내야 하니 일단 그만큼은 빼야 하고..”
아내가 째려보는 게 느껴져 말꼬리를 흐렸다.
“그건 내야지. 아우. 잊고 있었는데 다시 혈압 오른다.”
아내의 퇴직금으로 투자를 하긴 해야겠는데.
‘가만히 가지고 있는 게 맞을까. 대출금을 갚을까? 아니야 투자가 더 낫지.’
머릿속으로 답 없는 상황만 계속 만들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