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무조건 찬성.

1부 끝

by 고성프리맨

[우회 기록 저장. 폐기 절차 완료.]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데이터의 파편을 엿본 것 같았다.

거대한 관리 체계, 마치 수많은 인간을 분류하고 폐기하는 거대한 도시의 설계도.

단순한 오류의 흔적일까, 아니면 내가 착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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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기록 77-B]

폐기된 개체: A332302020. 상태: 종결.

말소처리됨. 도시 네트워크 동기화 중.

잔여 인구 처리율: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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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파편 중에서도 나에 대한 기억만큼은 또렷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낯선 목소리의 주인과 정상화된 미니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깼네. … 하, 빼내는 게 점점 힘들어져서 말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은 나중에 해. 아직 몸 상태가 완전치 않아.”


처음 보는 얼굴. 그런데도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한현오라는 이름은 이제 무의미해. 네 코드, A332302020도 방금 말소됐지.”


그는 건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게 말하면 새 시대의 국민이 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됐고, 자세한 건 미니미가 설명해 줄 거야. 회복하면서 듣도록 해.”


옆에서 미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이상하게도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아, 한 가지 더.”


남자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지원금은 끝났어. 이제 놀고먹을 생각은 접어. 네 몫은 네가 직접 벌어야 한다. 앞으로 공짜는 없어.”


그 말이 한참이나 맴돌았다. 말소, 지원금 종료… 그럼 앞으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궁금한 게 많겠지. 그래봤자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고. 꽤 긴 하루였지?”


미니미의 목소리도 어딘가 기계적이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고는 할게. 하지만 네가 했던 일까지 다 용서하는 건 아니야.”


앞으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정도는 알려줘야 되는 거 아닌가?


“궁금할 거야.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꽤 긴 하루였지?”


미니미의 목소리가 어딘가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고는 할게. 하지만 네가 했던 일까지 다 용서하는 건 아니야.”


조금 부드러워진 어조. 그러나 여전히 인위적인 감촉이 묻어났다. 남자는 이미 사라진 듯, 방 안엔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없었다. 애써 말을 꺼냈다.


“… 나,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그리고 넌?”


이 정도만 말해도 알아들을 것이다.


“그건…”


미니미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순간, 공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얼굴이 분리되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또다시 악몽이 시작되는 줄 알고. 그러나 그녀는 담담하게 분리된 얼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 누워 있는 상태라 어차피 움직일 수 없었다. ⎯ 숨이 막혔다.


그녀의 진짜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은색 관절, 유리 같은 안구, 그리고 작은 슬롯에 박힌 반짝이는 칩들. 얼굴 속은 정밀한 기계 구조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느꼈던 어색한 미소와 인위적인 목소리의 이유가 이제 명확해졌다. 그녀는 왼손 검지를 들어서 머리를 가리켰다.


“인공두뇌에 기억을 이전시켰어. 보다시피 겉보기엔 썩 나쁘지 않다고.”


미니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슬프게 느껴졌다.


“살아 있다고 해야겠지.”


말은 친절했지만, 그 말들이 내 가슴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네가 해내지 못했다면 나도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고마워.”


“그렇다면 나도…?”


혹시 내 몸도 로봇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불행하게도 넌 아니야.”


왜 하필 ‘불행’일까.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가 얼굴을 들어 다시 제자리에 결합시켰다.


“쉬어. 필요하면 테이블 옆에 있는 버튼 누르고.”


문을 나서기 전, 그녀가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등을 돌린 채 낮게 중얼거렸다.


“아직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할 거야.”


물어보고 싶었지만 미니미는 빠르게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몸을 움직이려 손을 쥐어보니, 손끝에서 희미하게 금속성의 차가운 감촉이 스쳤다.


‘… 뭐지?’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의미에 대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 방은 고요했다. 숨을 몰아쉬며 손끝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여전히 이상했다. 피부 아래에서 스치듯 느껴지는 금속성 감촉. 피가 돌고 있는데도, 차가운 이질감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미니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정확히 판단을 못하겠다.


갑자기 머릿속이 깨질 듯 아파왔다. 비명이 새어 나왔다.


[시민 자격: 재부여됨.]

[정상화 확인 대상.]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벽 한쪽에 걸린 거울을 마주했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었다. 나를 마주하는 순간. 아득한 소름이 등줄기를 훑었다. 거울 속 눈동자 속에서 숫자와 코드가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A332302020. 위치 확인. 도망자 신원 확인 완료. 섬멸 프로젝트 개시 허가.]


말소된 줄 알았던 코드명이 되살아났다. 숨이 막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나 거울 속 눈은 여전히 숫자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미니미가 외쳤다.

“도망쳐야 해!”


하지만, 거울 속 나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거울 속 내가 이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도망칠 수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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