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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1초의 의미를 되새겨 본 적이 있었을까?
보잘것없이 너무도 빨리 지나가버리는 시간.
하지만 그런 1초가 지금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해? 대체…!’
어느새, 미니미로 여겼던 괴물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나를 향해 벌어지는 입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죽… 어!]
기분 탓일까. 시스템이라 불리는 존재가 발악하듯 말을 토해내는 느낌이 들었다.
‘손안에 있는 도구를 꺼내기만 하면 바로 죽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마침내 1은 0을 향해 가고 있었다.
0…
.
.
.
콰직⎯
여느 때처럼 갈팡질팡 하더니…
결국 이 꼴이 되는구나.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할걸.
언제나처럼 한발 늦게 후회하는 건 바뀌질 않네.
‘만약에 자살을 받아들였으면 지금보단 나았을까?’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기분 나쁜 감촉…
시야가 캄캄해졌고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그나저나 시스템은 어디로 간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계속 지시했잖아?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물어봐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적… 같은 건 역시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이 오히려 이상했다고.
역시 나 같은 놈한테 뭘 기대해…?
.
.
.
[이유 불문하고 지금 당장 죽으십시오.]
‘... 다시 돌아왔다…? 뭐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다시 살아났다는 안도감보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아까 전엔 안 죽으면 끝인 것처럼 얘기하더니. 다시 돌릴 거면 뭐 하러 죽으라는 건데?”
[그런 적이 없습니다...? 오류 발생! 오류 발생!]
메시지가 순간 깜박이더니, 곧이어 붉은색으로 전환되었다. 경고음이 짧게, 하지만 끈질기게 반복됐다. 시스템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통제 불가. 관측 목표: A332302020. 폐기 프로토콜 자동 실행.]
“뭐야, 무슨 소리야!”
폐기라고? 화면의 문구는 더 이상 부탁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그리고 명령은 점점 구체적인 어조로 바뀌었다.
[폐기 절차 돌입.
1단계: 운동 기능 차단.
2단계: 신경 입력 억제.
3단계: 종결 모드 작동.]
마치 기계의 숨결처럼, 차갑고 무자비한 메시지였다.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포박당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설마, 시스템이… 내가 살아난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능성이 무작위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이대로 잠시 시간이 흐른다면 죽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오류: 외부 개입 신호 감지. 우선순위 재검토 요청. 연결 대기 중…]
메시지가 다시 깜박였다. 순간의 정적. 목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종결시키려는 시스템의 의지가 다시 한번 느껴졌다. 아까의 고통보다 몇 배는 더 심한 느낌이 들었다. 발버둥 칠수도 없이 끝없는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
“시스템 접속 해제.”
아주 낮은 톤의 새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분명 아까 도망친 목적지에서 내게 말을 걸던 음성이었다. 기계적 변조는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을 알아차리는 데는 충분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분노와 안도와 의문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유용하다고 했잖아. 힘들게 구해놓고 유용한 사람을 놓칠 생각은 없다고.”
[외부 개입: 식별 완료. 식별자: Unknown. 권한 레벨: 임시작전 승인.]
“네 종결 이벤트를 로그에서 봤거든. 원래라면 지금쯤 끝났어야 했는데… 그렇게 두지 않기로 했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고, 또 뭔가 할 수 있는 게 분명했다.
[경고: 보안 루틴 가동. 척살 모드 온.]
화면에 수많은 코드가 순간적으로 흩어졌다가 지워졌다. 그 암호의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와중에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어. 시스템을 속여야 해. 메시지는 곧 끊길 거야. 시스템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어. 잠시 후에 다시 만나자. 꼭.”
“어떻게 하라는 건데?”
이미 접속이 끊긴 듯 더 이상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바쁘게 움직이기만 했다. 이 속도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해결이 필요한데.
문득 손에 쥐고 있던 파우치가 떠올랐다. 분명 이 파우치를 이용하면 시스템을 속일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이 정리되자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아까의 망설임은 시스템의 강요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오롯이 내 선택이다. 파우치를 열었다. 날카로운 느낌이 몸을 베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멈췄다. 속임수, 기만. 선택은 내 것이었다.
[경고: A332302020 데이터 불일치. 폐기 대기 시간 지연됨. 재시도 중…]
기계의 목소리는 더욱 흉포해졌다. 손에 쥔 파우치가 묘하게 뜨거워졌다. 마치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가 시스템의 감각을 왜곡시키는 듯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파우치에서 휘발성의 빛이 흩날리며 몸을 덮었다.
[데이터 패킷 확인 중… 오류. 유효하지 않은 값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파편처럼 흩날린 좌표 데이터가 몸을 덮는 것 같았다. ⎯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여전히 설명이 쉽지 않은 일이다.
[… 정상 … 처리 확인 중. 좌표값 일치. 폐기 상태 확인 완료.]
[우회 기록 저장. 폐기 절차 완료.]
시스템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한 기계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폐기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이 순간 나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시스템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폐기 절차 완료라는 문구만 눈앞에 둥둥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