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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점빵 Sep 29. 2021

다들 그러고 살더라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고

밀레니엄 세대를 '밀레-리얼' 세대라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환상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실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분석이다. 동의한다. 이러한 '밀레 리얼'세대의 성격은 어떤 콘텐츠를 대할 때 특히 선명하게 나타난다. 다소간의 과장은 극적인 재미를 위한 장치로 인정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향해 그들은 좀처럼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때, 광고 바닥에서 젊은 타깃을 공략하기 위한 만능 키워드로 쓰이던 '꿈'이라는 단어가 그 기능을 거의 상실한  것도 같은 이유다. 내가 처한 현실에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판타지를 들이대며 '꿈을 이루어라!' 권하면, 이들은 콧방귀로 화답한다. 꿈같은 뜬구름 보다 오늘 하루의 현실을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은』 '밀레-리얼' 세대의 콘텐츠다. 총 8편의 짤막한 소설 속에 꿈같은 인물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와 내 주변을 대입해도 크게 이질감이 없을 정도의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생동감 있게 소환할 뿐이다.


부산하게 들뜨지도, 우중충하게 가라앉지도 않은 담담한 서술이 오히려 캐릭터와 상황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덕분에 대단한 세계관이나 담론, 첨예한 갈등 없이도 몰입감을 잃지 않는다.


책장을 덮고 뒤표지에 실린 소설가 정이현의 추천사를 다시 읽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설명해 줄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넣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다. 언론과 정치인들이 서로의 기득권을 위해 내일 당장 나라가 망할 듯 떠들어대는 와중에도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진짜 힘은 우리 모두의 그저 그런 삶이다. 그 속에서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일상의 감정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해 낸 것, 아니 기록해 낸 것이  『일의 기쁨과 슬픔』이 가진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일의 기쁨과 슬픔』 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은 결코 생기발랄하거나 명랑하지 않다. 그렇다고 우울의 진흙탕 속에서 질척거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뜻밖에 응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쁘다가 슬프고,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밉다가도 짠한 감정들을 두루 비벼 삼키며 그럭저럭 하루씩 살아내고 있는 보통의 삶이 주는 이런 위로 말이다.


'다들 그러고 사는구나, 사는 게 별다를 거 없지 그래. 유난하게 좋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만 특별히 재미없는 인생인 것도 아니구나.'


장류진 작가가 의도한 바와는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 해서 술에 술 탄 듯 지나갈 오늘의 밤을 흘려보내고 물에 물 탄 듯 다시 밝아 올 내일의 아침을 기다리는 일이 그리 허무하지만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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