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려고 한 대로 보고 있었다
좋은 콘텐츠에는 좋은 질문이 숨어 있다. 오랫동안 콘텐츠를 고민하며 발견한 사실이다. 나는 주로 온라인에서 회자되는 글이나 사진, 동영상을 콘텐츠로 여기고 봤다. 그 안에 잠시 빠져 만든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 보면 '오호'란 감탄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 이런 콘텐츠는 좋은 질문이 관류한다. 시의성 있고 공감이 간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서 아이스 버킷 챌린지 영상을 보고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싶은 느낌이 드는 식이다.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할 만큼 관심이 필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절로 궁금해진다. 그 물음이 버킷을 쏟는 행동을 결정한 셈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일상적인 일을 할 때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 과업은 주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이었다. 내 앞에 있는 문제의 뼈와 살을 정확히 발라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려면 질문 내용이 매우 중요했다. 이를테면 영업 책임을 맡을 때, '뭐 때문에 이렇게 매출이 떨어졌지?'보다 '무엇을 해야 매출이 오를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 더 필요했다. 어떤 결과에 대해 책임질 대상을 찾기보다 그 시간에 결과를 더 좋게 만들 요인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덕분이다. 질문의 관점을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내게 던지는 질문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엄격했다. 스스로 가진 정의를 다림줄 삼아 내면을 향해 각을 세워 질문했다. 내면의 부족한 실체를 직면하는 것이 성장의 길이라 여긴 탓이다. 타인을 향해 물을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보통 상대방과 대화할 때는 공감의 면적을 넓히는 방향으로 묻고 듣는다. 그저 진솔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얘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나를 향해서는 늘 정의감이 앞섰다. 부족함보다는 뛰어남이 많은 사람이 되어 남보다 두드러지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나를 향한 질문이 바뀌면서 이전과 다른 시각이 생겼다. 나를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좋은 콘텐츠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처럼,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볼 수 있는 물음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우월한 사람이 되기보다 고유성을 가진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으면서부터다. 이전처럼 자신을 몰아세우는 억지로 등을 떠미는 질문은 해로웠다. 그저 제 자리에 제대로, 오래 서 있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했다. 외부적인 것에 기준을 둔 탓에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고 넘어지는 패턴을 당장 그만두기로 했다.
내면의 질문이 전복되자 나에 대한 신비한 자신감이 생겼다. 우월하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감정과 달랐다. 고작해야 내가 속한 조직이나 인지하는 범위 내에서 경쟁력 있는 것으로 느꼈던 안정감은 무대가 바뀔 때마다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알기 위한 사려 깊은 물음과 그것을 통해 발견한 나만의 가치는 무언가를 이겨야 얻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에게 진솔하게 묻고 충실하게 듣는 시간을 통해 충분히 나를 이해할 때만 발견하는 본질이었다. 내가 남다른 관점을 찾는 것에 열정이 있다는 것을 이 과정에서 발견했다.
좋은 질문은 내가 쫒던 허상을 깨트리는 힘이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내게 가혹했던 시간, 누군가를 이기지 못하면 안달 났던 순간, 잘 해내지 않으면 불안해 견디지 못하는 고비가 사라졌다.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자신이 더 이상 초라하지 않고, 더 풍족하게 쓸 수 없는 모습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정작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바라보고 질문하지 못하면서 다른 모든 것에 시선이 묶여 살던 질풍 같은 시간을 졸업하게 됐다. 엉뚱한 자리에 가지 않도록 오늘도 내게 묻는다. 내가 혹시 남에게 하지 않을 질문을 자신에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좋은 질문이 좋은 인터뷰를 만들 듯
저 자신을 향한 따뜻한 질문으로
최고의 인터뷰를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