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
이것만큼은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소재 중 하나가 '모범생'이다. 내가 전형적인 우등생이었던 탓이다. 보통 재미없고 지루한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로 쓰이는데 표현과 달리 내 삶은 나름대로 즐겁고 유쾌했다. 특히 고등학생 때가 종종 떠오른다. 누구보다 먼저 점심 급식을 먹기 위해 5백 미터 떨어진 식당으로 경쟁하며 뛰었던 장면, 친구와 시시덕거렸던 추억, 친구들과 농구하며 땀 흘린 기억이 생생하다. 장난기가 많아서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특별히 벗어나거나 튀는 일 없이 주어진 틀 안에서 잘 누리며 지냈다.
사회에 나가보니 착실하고 무난한 사람은 인기가 없었다. 취업준비생 때 현직자와 가졌던 술자리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학생이었던 참석자들의 과거 이야기가 도마에 올랐다. 지금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과거 사연이 단연 화제였다. 외국 친구가 있어 특이한 경험을 했거나, 어떤 운동 대회를 몇 년씩 나가 꾸준히 메달을 받거나, 친구들과 소위 방황했던 추억이 이야깃거리가 됐다. 그에 비해 주머니 속 송곳 같은 뭔가가 없었다. 현직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긴장한 채 어울리려 애쓰는 나를 보며 어떤 현직자는 '로봇 같다'라고 했었다.
그 뒤로 나를 갇히게 하는 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 말은 내 속을 거울로 비춘 듯했다. 그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었지만 뭔가 억지스러운 느낌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선망하여 경쟁이 치열한 자리를 노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남들보다 그 자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디선가 읽었던 현직자 마인드를 머릿속에 각인하며 준비하는 단계부터 심신을 갖추고자 했다. 소위 모범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이것이 별 효과가 없었다. 이미 아는 것처럼 믿고 행동한다고 반드시 성취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새롭고 낯선 선택을 하려 애썼다. 새롭고 인상적인 인생을 만들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이를테면 우연한 기회에 들어갔던 비영리 스타트업이 대표적이었다. 한국에서 평이하게 학업 생활을 하며 자랐던 내가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길에 선뜻 들어선 것은 내면의 동기가 컸다. 도전의 아이콘이 되고 싶다는 과한 포부가 마음에 있었다. 그것이 추구하고 싶었던 인생의 지름길 같았다. 안주하지 않고 살기 위한 방책 같았으나 막상 겪고 보니 예상과 달랐고 실망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머리로만 알던 삶이 깨져갔다.
삶은 이미 아는 것처럼 선택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학생 때 시험을 보듯 미리 출제범위를 공부하고 문제를 예상하며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사는 것은 스스로 시야를 좁히는 일이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매번 철저히 조사하고 학습했다. 이를 통해 가장 좋은 경로라고 믿게 된 길을 걷다가 만난 상황은 대부분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 좋았을 텐데,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늘 아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왔다. 덕분에 피곤한 일이 많았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 때가 진짜 걸어야 할 때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경험이 쌓이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게 된다. 미래에 대한 시야도 이전보다 선명해져 나름대로 조망하는 힘도 생겼다. 예전에는 모르는 것이 많으면 시작도 못한 채 안다고 느낄 때까지 일단 공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는 의미다. 경험한 것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기에, 막막하고 두렵더라도 발걸음을 뗀다. 먼저 부딪혀 보겠다는 용기를 붙잡으며 당장 해야 할 것을 시작한다.
계획이란 말을 새롭게 봅니다.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알고자 정하는 것이라는.
제 삶에 대한 계획들도
시선을 고쳐 다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