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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May 28. 2020

지금 지키고 있는 원칙은 무엇인가

인생을 만들어가는 작은 씨앗을 돌보는 시간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종종 자신을 특별히 대우해주길 원하는 분을 만난다. 이전 회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할 때의 일이다. 온라인 광고를 본 고객이 회사로 전화해 제품에 대해 일이 매일 몇 건씩 들어온다. 이런 문의는 보통 제품을 어디서 구매하면 되는지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가격을 보며 대번에 비싸다고 으름장을 놓는 분이 있다. 여러 개를 구매할 것이라며 가격을 얼마까지 깎아줄 수 있는지 등을 거칠게 묻는다. '내가 원하는 조건이 아니면 언제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란 식이다. 반갑지만은 않은 고객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싸움에 밀리지 않으려 짐짓 엄격하게 말한다. 그 제품은 우리만 판매하고 있고 온라인 가격이 가장 저렴하다고 선을 긋는다. 실제로 경쟁사의 제품보다 저렴한 대다 시장에서 처음 판매하는 물건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별도로 오픈마켓과 계약을 맺고 행사를 하거나, 쿠폰을 더하면 좀 더 할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화 몇 통에 우리가 공표한 가격을 바꾼다면 있으나마나 한 기준일 것이다. 이전에 구매한 분에게도, 이후에 사게 될 분에게도 그 선을 명확히 지킨다는 사실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가격은 여러 실험을 거쳐 확정한 기준이었다.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상품에 어떻게 값을 매겨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경쟁사 상품의 가격 동향을 보고, 원가 등을 비교해 몇 가지 후보를 정했다. 처음에는 턱도 없이 싸게, 그 뒤에는 희망사항을 담아 좀 비싸게, 맨 나중에는 중간치로 가격을 조정하며 반응을 살폈다. 결국 중간 언저리에서 경쟁사 제품의 반값에 가까운 가격을 판매 포인트로 정한 뒤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몇 주 사이 등락하는 가격을 본 몇몇 고객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하찮아 보이는 시작이었지만 꾸준히 해가니 변화가 생겼다. 가격은 물론 제품 품질과 회사의 스토리를 엮어 만든 브랜드가 시중에서 별도로 식별되기 시작했다. 당장 포털과 주요 온라인 마켓의 검색어에 우리 이름이 올라왔다. 직접 우리 브랜드를 검색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중고 거래 장터에 비슷한 가격에 재거래되는 사례가 생겼고, 자발적인 리뷰도 올라왔다. 핫한 정보만 모으는 블로그에도 노출됐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를 인식하고 있었다. 가격을 포함해 제품에 대해 알린 모든 것이 지켜야 할 원칙이 됐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약속하고 항상 지키려고 애쓴 것이 과정의 전부였다. 우리 수준에 맞는 딱 맞다 싶을 정도로 규칙을 정한 것이 출발이었다. 지킬 수 있는 것만 정하고, 정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첫 점을 찍고 긋기 시작한 선이 시장의 기준이 되어 후속 상품들의 단가 경쟁을 유발하기도 하고, 추가 아이템의 마중물이 되기도 하며, 한 회사의 미래 사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모든 변화가 이른바 원칙 덕분이었다. 그 정체는 일을 시작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 둬도 또 다른 누군가를 통해 계속 이어지는 약속이었다.


문득 그것이 내 인생의 일부인 것을 깨달았다. 어떤 기대가 없던 작은 일이 좋은 방향으로 커진 경험이다. 만약 몇 번 시도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안 지키면 누구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고집은 그저 팀장의 책임감이었을까. 과거를 되짚으며 현재를 살핀다. 작은 씨앗을 돌보듯 스스로 한 약속을 일상에서 꾸준히 쌓아간다면 또 어떤 변화를 만들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기로 했던 일들이 쌓여 미래에 어떤 원칙으로 불릴지 살짝 그려보고 싶다.


제가 하기로 한 작은 것부터
지금 당장 꾸준히 할 수 있다면
좀 더 큰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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