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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곰돌이 Sep 10. 2018

네덜란드, '저녁'이 있는 삶 체험기

'돈'과 '시간'이 있으면 없던 저녁이 생겨날까 

<스물셋, 네덜란드 세렌디피티_4>

함께 지내는 동섭이 형과 경선이, 한섭이 형, 민규와 함께 토마토 파스타를 요리한다. 파스타 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그날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경선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탔다가 엉뚱한 곳에 내리는 바람에, 자전거가 있는 한섭이 형이 경선이를 기숙사까지 태워다 주었단다. 낯선 곳에 내려 당황했을 경선이에게 위로를 건네려다, 땀 범벅이 된 한섭이 형을 보며 40여분간의 사투를 짐작하니 입꼬리가 삐죽삐죽 움찔댄다. 동섭이 형은 오늘 점심에 터키인 여자 사람 친구와 단 둘이 피자를 먹었는데, 빳빳한 흰 셔츠에 멋들어진 베스트를 입고 머리에 한껏 힘을 준 형의 모습에서 그 설레임을 짐작한다. '이제 동섭이 형은 곧 여자친구가 생기겠네.' 아직 친구라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동섭이 형을 능글맞게 놀리며 냉장고에서 칵테일을 꺼낸다. 민규가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준비해 둔 녀석이다. 반찬이라고는 김치 뿐이고 술은 값싼 칵테일이 전부지만, 저녁으로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파스타를 배불리 먹은 뒤에는 설거지 당번을 걸고 카드게임을 한다. 설거지 당번이 정해진 다음에도 카드 게임은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당번 다음에는 소원권, 소원권 다음에는 노래부르기... 내깃거리 쯤은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좋은 핑계 거리에 불과하다. 웃음소리가 벽을 타고 방을 맴돈다. 문이 덜컥거리며 맞장구를 친다. 눈이 끔벅끔벅 감기고, 고개가 꾸벅꾸벅 진자 운동을 할 때까지 웃음소리는 맴을 돈다. 하나 둘 입이 벌어질 때면 카드 게임을 정리하고 다같이 설거지를 한다. 당번은 따로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풍족한 만찬은 아니더라도, 네덜란드에는 대부분 저녁이 있다.


한국에서는 저녁 있는 삶이 요즘 인기다.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저녁'을 이야기한다.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는 근로시간 단축이 7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한켠에서는 '저녁시간이 있는 삶'을, 다른 한 쪽에서는 '저녁거리 살 돈이 없는 삶'을 주장하며 '저녁 있는 삶'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너도 나도 '저녁 있는 삶'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방법도 각양각색이라, 한 쪽에서는 임금을 올리자 하고, 다른 쪽에서는 빨리 퇴근해서 저녁을 가족과 함께 보내라 한다. 그런데도 저녁 시간에 마음 편히 밥을 먹어 본 지가, 이렇게 둘러 앉아 요란하게 웃어 본 지가 오래간만이다. 시간도 돈도 저녁 있는 삶에 필요한 부분임에는 분명한 듯 보이지만, 이 가운데 저녁 있는 삶을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저녁'을 갖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요건이 무엇인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6시에 퇴근하라고 재촉한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직장 상사도, 5시부터 저녁 약속을 떠올리는 사원들도 실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저녁'이라는 신기루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온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볼 뿐이다.
 - 오스틴 돕슨


저녁이 있는 삶은, 단순히 돈이나 시간이 넉넉한 삶은 아닌 것 같다. 마치 돈이나 시간이 있어도 모두가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하다. 만약 돈과 시간이 그렇게나 절대적이라면, 세계 200여개 국가 가운데 GDP(국내총생산) 순위가 11위와 12위를 오락가락 하는 한국에서 저녁 있는 삶이 이렇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을 거고, 국민 행복도가 OECD 회원국 34개국 가운데 '꼴찌에서 두 번째'를 전전하지도 않았을 거다.


네덜란드에서 가족들은 메뉴를 함께 상상하고, 함께 마트를 돌며 저녁거리를 고민하고, 노오란 전등갓 아래 모여 앉아 서로의 일상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운다. 그럴 시간이 부족한 대학생들조차도 어려운 과제를 해 낸 친구를 축하하고, 소파에 둘러앉아 끝나지 않는 토론 주제를 붙들고 삶의 이야기도 나눠 본다. 학교생활은 어떤지, 요즘 친구들과 즐기는 게임이 뭔지, 아빠 엄마의 취미는 뭔지 물어도 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픽 웃음이 터지게 되는 것, 그게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닐까. '저녁'은 비싼 것도 아니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저녁'은 값비싼 레스토랑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침9시에 출근해서 오후5시에 퇴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저녁은 고추장과 참기름을 양껏 넣은 양푼 비빔밥에도 있고, 늦은 밤 퇴근길에 후라이드 통닭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품에도 있다.


아파야만 청춘인 게 아닌 것처럼, 
삶의 '저녁'은 영원히 없다가도 매일 있다.





[1]. 중앙일보, 2018-05-28, '저녁이 있는 삶'좋긴 한데...'주 52시간 근무 강제'의 역설

[2]. 연합뉴스, 2018-06-23, 주52시간...저녁 있는 삶 될까, 월급만 줄어들까

[3]. 한국경제, 2018-04-12, '저녁 있는 삶'보다 저녁거리 살 돈이 중요...일 더하게 해주세요

[4]. SBS뉴스, 2018-03-12, '저녁 있는 삶'좋은데...월급 줄어들까 걱정

[5]. SBS뉴스, 2016-01-13, '평일 오후 5시' 집에서 가족과 함께...저녁이 있는 삶

[6]. 연합뉴스, 2018-08-16, 한국 GDP 순위 11위서 12위로...1인당 GNI는 14계단 상승

[7]. 한국일보, 2017-04-05, 한국 국민행복도 '꼴찌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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