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다 생각난 관계 속의 '나쁜 태도'에 대해
출퇴근 길에 읽고 있던 책의 한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더 많은 이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두 문단을 발췌해 적어본다.
어떤 어른들은 어린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울리고 싶어 한다. 어린이가 우는 모습조차 귀여워서 그럴 것이다. 그저 장난으로, 어린이의 오해를 유도해서 울게 만든다. 그 우는 모습을 '반응'이라고 여기며 즐거워한다. 잠깐이니까, 울고 나서 달래면 되니까. 정말로 큰일은 아니니까. 귀여워서 그러는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이만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애들은 다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분명하다. 어린이를 울릴 수도, 울음을 그치게 할 수도 있다고.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는 대상화된다. 어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큰 오해다.
[어린이라는 세계/사계절/ 김소영 지음]
나는 '반응이 좋아' 놀려먹기 좋은 동생이며 친구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그 사람은 나한테 왜 그래?' 하면 돌아오는 지인들(또는 당사자들)의 답은 '네 반응이 재미있으니까!'였다. 만약 내 '반응'을 기대하며 은근한 말투로 나를 놀려먹던 사람에게 내가 정색하며 '그건 예의없는 말이다.'라고 하면 상대는 '네가 너무 예민한 것 같아, 장난일 뿐인데' 같은 식으로 변명하곤 했다. 재미있는게 아니라 분노하고 항의하는 내 반응에 당황한 상대의 반응은 자주 '사과'가 아니라 '네가 너무 예민하다'는 '남 탓'이었다. 나를 상처입힌 상대의 적반하장식 태도는 여러번 나를 입다물게 했다. 스스로 반성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어떤 말도 더 해줄 애정같은 것이 내게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인지 이렇게 섬세하게 타인을 배려하는 이의 글은 내게 위안이 된다.
살아오면서 만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늘 자신의 진짜 의도가 드러났을 때, 비겁한 변명 뒤로 숨는 일을 종종 목격했다. 그런 이들은 뻔뻔한 가면을 쓰고, 자신의 '잘못 없음'을 항변하기 바빳다.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지만, 실수를 인정하거나 하지않는 태도에 대한 문제는 나이와 관련이 없다.
요즘은 나 역시나 보다 많이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늘 되새긴다.
'실수는 할 수 있으나, 실수 이후의 태도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그리고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고의적 행동은 그게 어떤 정도의 것이건 간에 좋은 행동이 아니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