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운「특급품」, 상처와 회복탄력성에 관한 성찰

생각의 서고 39화

by 소는영

Chapter I.


1.


일본어로 '가야(榧)'라고 부르는 나무가 있다. 우리말로는 비자목(榧木), 한자로는 비(榧)라 쓴다. 이 나무는 상록침엽수로 제주도와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자생하며, 그 목재는 치밀하고 결이 곱기로 유명하다.


특히 두께 여섯 치 정도 되는 통나무에서 연륜이 고르게 자란 부분을 잘라내면, 그것이 바로 바둑판의 최상급 재료가 된다.



2.


비자목 바둑판, 일본식으로는 기반(碁盤)이라 부르는 이 물건은 우리가 흔히 보는 오동나무로 사방을 짜고 속을 비워 돌 놓을 때마다 '떵떵' 소리 나는 한국식 바둑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바로, 통나무를 그대로 깎아 만든 일본식 바둑판오로서의 특성이 매우 독특한 점에 연유한다.



3.


비자목은 연하고 탄력이 있다. 그래서 두세 판의 바둑을 두고 나면 반면(盤面)이 오목하게 들어가 마치 곰보 같은 흔적이 생긴다. 바둑돌이 놓이는 자리마다 미세하게 패인 자국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바둑판을 얼마간 그냥 내버려 두면 반면이 다시 본래대로 평평하게 돌아온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비자목 바둑판의 가장 큰 특징이며, 비자목을 바둑판 재료로 귀하게 여기는 이유다.


사람들이 비자목을 바둑판의 최고급 재료로 치는 까닭은 오로지 이 유연성(柔軟性) 때문이다. 바둑돌이 반면에 닿을 때의 부드러운 감촉, 비자목 바둑판이라면 여느 바둑판보다 어깨가 덜 결린다는 그 편안함. 아무리 흑단(黑檀)이나 자단(紫檀)이 귀한 목재라 하더라도, 이런 나무들로는 바둑판을 만들지 않는다.


단단함보다는 유연함이, 견고함보다는 회복력이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4.


그런데 비자목 바둑판에는 더욱 흥미로운 등급 체계가 있다. 일등품 위에 또 한 층 뛰어난 특급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재질이나 치수, 연륜의 고름 등 어느 점에서도 일등품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특급품으로 분류되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반면에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는지의 여부다.


값으로 따지면 이 차이는 더욱 역설적이다. 전쟁 전 시세로 일등품이 2천 원(바둑돌은 따로) 정도였다면, 특급품은 2천 4, 5백 원에 거래되었다.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싸진다는 데 묘미가 있다.



5.


이것은 단순히 희소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 흉터가 품고 있는 의미, 그것이 증명하는 어떤 본질적 가치, 그것의 함의 때문이리라.


반면이 갈라지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다. 사고란 언제 어디서든 환영받을 일이 아니다. 균열의 성질에 따라서는 일등품 바둑판이 순식간에 목침 수준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고 회생의 여지가 있는 정도의 균열이라면, 사람들은 그 바둑판을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싸고 뚜껑을 덮어 간수한다. 갈라진 틈 사이로 먼지나 티끌이 들어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1년, 2년, 때로는 3년까지 그냥 내버려 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와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 동안 상처 난 바둑판은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 본래대로 유착(癒着)해 버린다. 균열이 진 자리에는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



6.


이처럼 비자목의 생명은 유연성에 있으니, 한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 힘으로 다시 유착하고 결합했다는 것은 그 유연성이라는 특질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일종의 졸업 증서인 셈이다. 하마터면 목침이 될 뻔했던 불구의 물건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내면 도리어 한 급이 올라 특급품이 된다. 이보다 더 역설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7.


이 비자목 바둑판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것이 단순히 바둑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것은 인간의 삶, 특히 인간이 겪는 상처와 과실(過失), 그리고 그것을 통한 성장과 성숙에 관한 심오한 은유였다.


상처가 있어서 더 귀해지는 바둑판처럼, 인생에서도 상처와 실패를 겪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특급품'이 아닐까.



8.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 부른다. 역경이나 트라우마, 비극, 위협, 또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오거나 오히려 더 나은 상태로 도약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비자목 바둑판의 이야기는 단순한 회복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시사한다. 상처가 오히려 그 존재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역설적이지만 심오한 진리 말이다. 이에 따라. 나는 비자목 바둑판의 은유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왜 우리는 상처를 피할 수 없는가. 상처는 어떻게 우리를 성장시키는가. 특급품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상처를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Chapter. II


9.


비자목 바둑판이 특급품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균열이라는 상처를 겪어야 한다. 이 균열은 의도되거나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지점은, 상처가 본질적으로 우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과실(過失)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꽁무니에 달고 다닌다. 그 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나는 절대로 과실을 범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떤 공인된 인격도, 어떤 학식도, 어떤 지위도 이것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는 유한한(finite) 존재이며, 불완전한(imperfect) 존재다. 인지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감정적으로 요동치며, 육체적으로 취약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과실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10.


철학적으로 이는 인간의 투사성(被投性, Geworfenheit)과 연결된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우리가 태어난 시대, 장소, 가족, 신체적 조건 등 우리 존재의 기본적 조건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던져진' 상태에서 우리는 삶을 기획(企劃, Entwurf)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오판과 실수는 구조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인지적 한계도 과실의 불가피성을 설명한다. 대니얼 카너먼이 밝혔듯이, 우리의 사고 체계는 빠르고 직관적인 '시스템 1'과 느리고 숙고적인 '시스템 2'로 구성되어 있다. 일상의 대부분 판단은 시스템 1에 의존하는데, 이것은 효율적이지만 다양한 인지적 편향에 취약하다. 확증편향, 가용성 휴리스틱, 고정관념, 과신 등 수많은 인지적 오류들이 우리의 판단을 왜곡한다.



11,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일생을 과실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접시 하나, 화분 하나를 깨뜨리는 작은 과실에서부터 일생을 진창에 파묻어 버리는 큰 과실에 이르기까지, 여기에도 천차만별의 구별이 있다.


직책상의 과실이나 명리(名利)에 관련된 과실은 보상할 방법과 기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과실도 있다. 교통사고로 타인의 육체를 훼손했다거나, 잘못으로 인명을 손상했다거나 하는 경우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물리적 사고나 법적 과실만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일어나는 상처들이 있다. 애정 윤리의 일탈, 애정의 불규칙 동사, 애정이 저지른 과실로 해서 뉘우침과 쓰라림의 십자가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어떤 생활, 어떤 환경 속에도 톨스토이의 카츄샤가 있고, 호손의 '주홍 글씨'의 주인공은 있을 수 있다. 다만 다른 것은, 그들 개개인의 인품과 교양, 기질에 따라 그 십자가의 경중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12.


현대 사회는 이러한 과실의 가능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복잡성의 증가, 선택지의 폭발적 확대, 정보의 과부하, 관계의 유동성 등은 모두 우리가 실수할 가능성을 높인다.


전통 사회에서는 삶의 경로가 비교적 명확했고, 규범이 엄격했으며, 선택의 폭이 제한되어 있었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며, 그 선택들의 결과를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요컨대, 상처와 과실은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건 상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치유하며 어떻게 그것을 통해 성장할 것인가에 있다.


비자목 바둑판의 균열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균열이 어떻게 치유되는가, 그리고 그 치유의 과정에서 무엇이 증명되는가이다.



13.


비자목 바둑판 이야기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은,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흉터가 있는 바둑판이 흉터가 없는 바둑판보다 더 비싸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상처나 흉터는 보통 결함으로 간주되며, 물건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런데 왜 비자목 바둑판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명확하다. 그 흉터는 단순한 결함이 아니라 '증명(證明)'이기 때문이다. 무엇의 증명인가? 바로 그 바둑판이 가진 유연성, 회복력, 자기 치유 능력의 증명이다. 이미 수차례 반복하였듯, 비자목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유연성이다. 그런데 이 유연성은 추상적인 특성이어서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균열이 생기지 않은 일등품 바둑판도 분명 유연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증명되지 않은 잠재력일 뿐이다.


반면, 한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 힘으로 다시 유착하고 결합한 바둑판은 다르다. 그것은 자신의 유연성을 실제로 시험받았고, 그 시험을 통과했다. 흉터는 바로 그 시험 통과의 증표다. 그것은 이력서가 아니라 졸업 증서다. 잠재력의 주장이 아니라 능력의 입증이다.


인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동한다. 상처를 겪지 않은 사람과 상처를 겪고 그것을 극복한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의 강인함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고, 후자의 강인함은 실전에서 입증된 것이다. 전자의 지혜는 이론적인 것이고, 후자의 지혜는 체험적인 것이다.



14.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통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 고통은 더 이상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극한의 상처를 겪고도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그 경험이 없었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실존적 깊이를 획득한다. 이것이 바로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는 현상이다.


외상 후 성장 연구자들인 테데스키와 칼훈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다음과 같은 영역에서 긍정적 변화를 보고한다고 밝혔다.


첫째, 자신의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나는 이것도 이겨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둘째, 타인과의 관계 깊이의 증가("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셋째, 삶의 우선순위 재정립("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넷째, 실존적·영적 변화("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다섯째,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전에는 시도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게 되었다"이 바로 그것이다.



15.


이것이 바로 흉터의 역설이다. 상처 그 자체는 결함이지만, 그 상처를 통과하고 치유한 흉터는 오히려 존재의 깊이를 증명하는 표지가 된다. 일본의 전통 도자기 수리 기법인 긴츠기(金継ぎ)가 이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깨진 도자기의 금간 자리를 금가루를 섞은 옥으로 이어붙이는 이 기법은, 상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한다. 그 금빛 흉터야말로 그 도자기의 역사이자 고유성이며, 그것이 겪은 시련과 회복의 서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6.


하지만 모든 상처가 특급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비자목 바둑판의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조건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친다는 점이다. 외부의 접착제나 수리로 이어 붙인 것이 아니라, 바둑판 자체가 가진 유연성과 생명력으로 스스로 유착한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회복탄력성의 본질을 발견한다. 회복탄력성은 외부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적절한 외부 지원(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은 치유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치유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타인이 대신 치유해줄 수는 없다. 그것은 본인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명력의 발현이다.



17.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적 통제소재(internal locus of control) 개념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주로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서 찾는 사람들은, 외부 환경이나 운명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보다 높은 회복탄력성을 보인다. 이들은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다.


또한 '제 힘으로' 치유한다는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비자목 바둑판도 1년, 2년, 때로는 3년이 걸린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와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하는 동안, 느리지만 확실한 치유가 일어난다. 그러나 작금의 현대사회는 즉각적인 해결을 선호한다. 빠른 치유, 신속한 회복, 즉각적인 효과. 하지만 진정한 치유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정신과 의사이자 트라우마 전문가인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는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체에 각인되는 경험이며, 따라서 그 치유도 전인적이고 장기적인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지적 이해만으로는 부족하고, 감정적 처리와 신체적 통합이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18.


더 나아가, '제 힘으로' 치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recovery)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합하여 새로운 자기(self)를 형성하는 것(resilience)이다.


비자목 바둑판도 완전히 예전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머리카락 같은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그 흔적이야말로 이제는 그 바둑판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고, 오히려 가치를 높이는 요소가 된다.


심리학자 댄 맥아담스는 인간의 정체성을 내러티브 정체성(narrative identity), 즉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특급품이 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와 고난을 삶의 이야기에 통합하여 의미 있는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극복했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더 강해졌다", "그 아픔이 나를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들었다"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19.


결국 특급품이 되기 위한 조건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것. 둘째, 외부의 적절한 지원을 받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내적 자원으로 치유할 것. 셋째, 충분한 시간을 허용하고 그 경험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통합할 것.


이 세 가지가 충족될 때, 상처는 단순한 결함에서 존재의 깊이를 증명하는 흉터로 변모한다.




Chapter III.


20.


과실(過失)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윤리학의 가장 복잡한 문제 중 하나다.


한편으로 우리는 과실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 과실을 예찬하거나 장려할 수는 없다. 과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신뢰를 깨뜨리며, 사회적 질서를 훼손한다. 따라서 책임을 물어야 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과실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관대함도 필요하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앞서 언급하였듯, "나는 절대로 과실을 범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공인된 인격도, 높은 학식도, 막중한 지위도 이것을 보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과실을 저지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배제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단죄하는 것이 된다.



21.


이러한 이중적 태도의 필요성은 법학에서도 인정된다.


대표적으로 형법은 고의와 과실을 구분하는데, 고의범은 결과를 의도하고 실현한 경우이고, 과실범은 주의의무를 위반하여 결과를 발생시킨 경우다. 양자는 비난가능성의 정도가 다르며, 따라서 처벌의 경중도 다르다. 이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의 한계를 법이 인정한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민법의 과실 개념은 더욱 섬세하다. '추상적 과실'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기준으로 하고, '구체적 과실'은 본인의 평소 주의정도를 기준으로 한다. 이는 과실을 판단함에 있어 획일적 잣대가 아니라 맥락과 능력을 고려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법적 책임의 영역을 넘어서는 도덕적·실존적 차원의 과실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애정 윤리의 일탈이 그 대표적 예다. 법은 이를 규율하지 않거나 매우 제한적으로만 개입한다. 이 영역에서 과실에 대한 관객석의 비판은 언제나 추상(秋霜)같이 날카롭고 가혹하다. 이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 그러하다.



22.


비자목 바둑판의 이야기를 쓴 김소운 선생은 전쟁 미망인을 만난 경험을 서술한다. 사변으로 남편이 납북된 채 생사를 모르는 그 여인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채 "선생님도 저를 경멸하시지요. 못된 년이라고……" 하고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다. 이 여인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 기준은 언제나 '청교도적' 순결과 절개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유일무이의 표준일 수 있는가?


전쟁이 빚어낸 비극 중에서도 가장 호소할 길 없는 비극은, 죽음이나 납치로 사랑하고 의지하던 짝을 잃은 그 슬픔이다. 전쟁은 왜 하는가? 내 국토와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국토는 왜 지키는가? 자유는 왜 필요한가? 아내와 남편이 서로 의지하고, 자식과 부모가 사랑을 나누며 떳떳하게,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보람, 그 사랑의 밑뿌리를 잃은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극단적으로 말하면 전쟁에 이겼다해도 그 희생이 당사자에게 보상되는 것은 아니다. 죽은 남편이, 죽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닐테니깐.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저지른 과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신산과 고난을 무릅쓰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의 절조와 용기는 백 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공식, 그 도의 하나만이 유일무이의 표준일 수는 없다. 그들이 굶주린, 그들의 쓰라림과 눈물을 먼저 계량할 저울대가 있어야 한다.



23.


과실을 범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가 있다 하여, 그것을 일괄적으로 탓하고 나무랄 수는 없다. 여기에는 확연히 구별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제 과실을 제 스스로 미봉(彌縫)해 가면서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 목숨을 누리는 자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심지어 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기도 한다. 이들의 과실은 단순한 실수나 연약함이 아니라 도덕적 무감각과 이기심의 발현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는 문제 삼을 것도 없다. 이는 비자목 바둑판으로 말하면, 균열이 생긴 후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고 그냥 썩어가는 목재와 같다.


둘째, 과실의 생채기에 피를 흘리면서 뉘우침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며, 진정한 참회와 속죄의 과정을 밟는다. 이들에게 과실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실존적 위기이며, 그 위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인격의 전면적 재구성이 일어난다.



24.


이 두 부류 사이의 차이는 명확하다.


전자는 과실을 부정하고 은폐하며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후자는 과실을 인정하고 드러내며 그 의미를 탐구한다.


전자는 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후자는 변화를 수용하고 오히려 그것을 추동한다.


전자는 과실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후자는 과실을 통해서 살아간다.



25.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의 개념이 이를 설명한다.


건강하지 못한 방어기제는 부인(denial), 투사(projection), 합리화(rationalization) 등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상대방이나 환경 탓이다",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식이다.


반면 성숙한 방어기제는 승화(sublimation), 유머(humor), 이타주의(altruism) 등이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전환한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것은 '수치심(shame)'과 '죄책감(guilt)'의 차이와도 연결된다. 수치심은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자기 존재 전체에 대한 부정적 평가다. 이는 과실을 직면하기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부인과 회피로 이어진다. 반면 죄책감은 "내가 나쁜 행동을 했다"라는 특정 행위에 대한 평가다. 이는 자기 존재의 핵심은 보존하면서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고 교정할 수 있게 한다.


브레네 브라운의 수치심 연구는 이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수치심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려 하고, 완벽주의에 빠지며, 타인과의 연결을 차단한다. 반면 죄책감을 건강하게 다루는 사람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며, 오히려 더 깊은 연결을 추구한다.



26.


과실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대응은 죽음이다. 김소운 선생의 원문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과실을 저지른 후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죽은 여인의 예화가 나온다. 이렇게 준엄하게, 극단의 방법으로 하나의 과실을 목숨과 바꾸어 즉결 처리해 버린 그 과단, 그 추상열일(秋霜烈日)의 의기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의를 표할 뿐이다. 여기에는 이론도 주석도 필요치 않다.


죽음은 절대다. 이 죽음 앞에는 해결 못할 죄과가 없다. 죽음을 통한 속죄는 가장 완전하고 최종적인 형태의 책임이행이다. 어느 범부(凡夫)가 이 용기를 따르랴! 더욱이나 현대 세태에서 이런 이야기는 옷깃을 가다듬게 하는 청량수요, 방부제다.



27.


그러나 백 번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 하나의 여백을 남겨 두어야 한다. 과실을 범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들, 특히 과실의 생채기에 피를 흘리면서 뉘우침의 가시밭길을 걷는 이들을 위한 여백 말이다.


만약 죽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미 여러 번 죽었어야 한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알베르 카뮈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자살이다"라고 말했다.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과실을 저지른 후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쉬운' 길이다. 그것은 고통을 종결시키고, 책임을 완수하며, 논란을 잠재운다. 그러나 살아남아서 그 과실을 온전히 직면하고, 그 의미를 탐구하며, 그것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프레드리히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 말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죽음에 이를 만큼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라면,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강화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이것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에 압도되어 무너지거나, 만성적인 고통 속에 갇히거나, 쓴맛과 원망으로 경직된다. 하지만 일부는, 그 상처를 통과하여 이전보다 더 깊고 더 강하고 더 지혜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죽음을 택한 이들을 존중하되,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존엄과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일급품 위에 특급품이라는 예외를 인정하듯이 말이다. 이것은 도덕적 상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실존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성숙한 윤리관이다.



28.


김소운 선생이 그 수필을 쓴 시대는 전쟁 직후였다. 남의 나라에서는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논의된 지 오래였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백 년, 이백 년 전의 윤리관을 탈피하지 못한 채 새것과 낡은 것 사이를 목표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그 공백 시대에도 애정 윤리에 대한 관객석의 비판만은 언제나 추상같이 날카롭고 가혹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변했다. 21세기의 한국사회는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인식도 크게 향상되었다. 성 윤리도 많이 개방되었고, 이혼도 더 이상 큰 낙인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과실에 대해 더 관대해졌는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법적으로 간통죄가 폐지되었고(2015년), 혼전 동거나 비혼 출산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가 높아졌다.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이는 분명 변화이다.


그러나 동시에, 디지털 시대의 감시 문화는 과실에 대한 응징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SNS에서의 '마녀사냥', 과거의 실수를 영구히 기록하는 인터넷 아카이브, 익명성에 기반한 무자비한 비난 등은 과실을 저지른 사람에게 어떤 회복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한번 찍힌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한번 내려진 판결은 번복되지 않는다.



29.


취소 문화(cancel culture)라고 불리우는 이것은, 누군가의 과거 발언이나 행동이 문제가 되면, 그 사람의 경력 전체가 부정되고, 그가 이룬 모든 업적이 무효화되며, 그에게 어떤 변화나 성장의 가능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과실에 대한 엄격함이 아니라 복수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집단적 폭력이다.


진정한 윤리적 성숙은 엄격함과 관대함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과실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과실을 저지른 사람의 인간성 전체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회복의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파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응보적 정의관에서 탈피하여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형사정책상 원리가 여기서 참고할 만하다. 전통적 형사사법은 범죄자를 처벌하고 격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회복적 사법은 피해 회복, 관계 복원, 재통합을 강조한다.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하고, 공동체는 양자를 모두 받아들인다. 이것이 가능할 때, 과실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다.



Chapter IV.


30.


비자목 바둑판이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친다는 것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 물리적 현상이다. 나무의 세포 구조와 수분 함량,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 따른 팽창과 수축이 결합하여, 갈라진 틈이 서서히 메워진다. 이는 생명체의 자기 조직화 능력의 한 예다.


인간의 회복탄력성도 마찬가지로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체계다. 심리학 연구들은 회복탄력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정서 조절 능력(emotional regulation)이다. 강렬한 부정적 감정을 경험할 때,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감정을 억압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감정을 충분히 느끼되, 그것이 사고와 행동을 완전히 지배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것이다. 명상이나 마음챙김(mindfulness) 같은 기법들이 이를 강화한다.


둘째, 인지적 유연성(cognitive flexibility)이다. 상황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고착된 사고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이 끝이다", "나는 망했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다" 같은 극단적이고 경직된 사고는 회복을 방해한다. 반면 "이것도 지나갈 것이다", "이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같은 유연한 사고는 회복을 촉진한다.


셋째,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며, 우리의 회복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실질적 도움을 얻는 것은 회복에 결정적이다. 비자목 바둑판도 헝겊으로 싸여 보호받는다. 완전히 홀로 내버려지면 치유되기 어렵다.


넷째, 의미 부여 능력(meaning-making)이다. 고통스러운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그 경험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선다. 빅터 프랭클이 말했듯이, 의미를 가진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이 의미는 종교적일 수도 있고, 실존적일 수도 있으며, 관계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자신의 삶의 내러티브에 통합하는 것이다.


다섯째,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나는 이것을 다룰 수 있다"고 믿는 능력이다. 이는 맹목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과거의 성공 경험에 기반한 현실적 자신감이다. 작은 성공들을 축적하고, 그것을 기억하며, 새로운 도전에 적용하는 것이 자기 효능감을 강화한다.


여섯째, 목적의식(sense of purpose)이다. 자신의 삶에 방향과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타인, 가치, 이상)에 헌신할 때, 개인적 고통은 상대화된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나는 살아남아서 이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섯 가지 요소들은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강화한다. 정서를 잘 조절하면 인지적 유연성이 높아지고, 사회적 지지를 받으면 자기 효능감이 강화되며, 의미를 발견하면 목적의식이 명확해진다. 회복탄력성은 이 요소들의 총체적 상호작용의 결과다.



31.


비자목 바둑판의 치유에는 1년, 2년, 때로는 3년이 걸린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와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오래 걸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양한 조건들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추운 겨울에는 수축하고, 더운 여름에는 팽창하며, 건조한 가을과 습한 봄을 모두 경험하면서, 나무는 새로운 평형을 찾아간다.


인간의 회복도 마찬가지다. 시간 그 자체가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경험과 변화가 치유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애도의 과정(grieving process)으로 설명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겪는 다섯 단계(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를 제시했는데, 이는 모든 큰 상실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단계들이 선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 단계들을 순서대로 거치지 않고, 앞뒤로 오가며, 때로는 여러 단계를 동시에 경험한다. 어느 날 수용의 단계에 있는 것 같다가도, 다음 날 다시 분노가 치솟을 수 있다. 이것은 퇴행이 아니라 치유 과정의 자연스러운 일부다.



32.


그러나 이미 주지하였듯, 현대 사회는 빠른 치유를 선호한다. 약물치료는 몇 주 내에 증상을 완화시킨다고 약속하고, 단기 심리치료는 8-12회기면 충분하다고 말하며, 자기계발서는 '30일 안에 당신의 삶을 바꾸라'고 부추긴다. 이것들이 일정 부분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깊은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훨씬 더 오래 걸린다.


트라우마 전문가 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 회복을 세 단계로 설명한다. 첫 단계는 '안전 확보'로, 트라우마를 일으킨 상황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기억과 애도'로, 트라우마 경험을 안전한 환경에서 재처리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일상으로의 재연결'로, 자신, 타인, 세계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각 단계는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릴 수 있다.



33.


시간은 '거리' 또한 제공한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는 그것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시야 전체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산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 산에서 멀어지고, 더 넓은 풍경 속에서 그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산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이제 그것은 풍경의 한 부분일 뿐 전부가 아니다. 심리학자 다니엘 길버트는 이를 설명하고자 정서적 면역체계(psychological immune system)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우리 몸이 질병에 대한 면역체계를 가지듯이, 우리 마음도 부정적 경험에 대한 심리적 방어와 회복 기제를 가지고 있다. 이 체계는 자동적으로 작동하지만, 그 작동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급성 감염에서 회복하는 데 며칠이 걸리듯이, 심리적 상처에서 회복하는 데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회복탄력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인내심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그 시간 동안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Chapter V.


34.


특급품의 이야기는 일견 단순하다. 이는 "회복탄력성의 중요성을 보여준다'는, 이른바 한줄요약으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지독히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깊은 함의를 맛보고자, 자신의 삶과 경험을 연결시켰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교과서 문장에 머물지 않게 된다(공교롭게도, 실제 「특급품」이 국어시험 지문으로 출제된 적이 있는데, 1999학년도 수능시험 언어영역 31번이 그러했다). 우리는 경험으로, 몸으로 항상 기억한다.


오늘 하루도, 흔적으로서 상처를 입었을지 모르는, 이름모를 당신과 나에게 한마디 건네본다.




오늘도 수고했어.



2025.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