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것보다는 맛있는 도시락

by 초름

신입사원이 된 저는 제 전공과 다른 업무를 맡게 되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연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회사와 협약을 맺은 S대학교에서 3개월 동안 연수를 받는 일정이에요. 회사의 선배님들이 해주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열심히 석사 학위 땄는데 전공과 다른 파트에 오게 되어 아쉽지요? 그래도 이 파트에서도 배울 점이 많을 거니까 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선배님들. 실망입니다. 제 마음을 이렇게 모르시다니요.

저는 지금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는걸요.

물론 전공을 살릴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있긴 하지만, 그저... 없지는 않은 정도랄까요? 2년 동안 실컷 해서 그런가 더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제 전공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걸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마침 잘 된 것이지요. 무엇보다 지금 받고 있는 연수가 저를 정말 행복하게 합니다.


첫째로 상사가 없다! 최고의 장점입니다. 신입사원 20명과 한 반에 모여 8시부터 5시까지 수업도 듣고, 수다도 떨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니까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에요. 다만 체력이 좀 딸리는... 쉬는 시간에 자는 사람이 많아서 복도에 나가서 떠든다거나, 허리가 아파서 산책을 가야 한다거나, 점심 먹고 비타민D를 흡수하기 위해 창문 앞에 모여있다거나, 종례가 끝나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서 퇴근버스를 탄다거나... 아줌마 아저씨 잘 달리지?


둘째로 지방에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 저희 회사는 상당히 지방에 있어서 통근을 하려면 새벽 6시에 셔틀을 타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섯 시에는 일어나야 해요. 그런데 지금은 6시 40분에 나가도 충분합니다. 새벽의 40분은 다른 시간대와 그 값을 같게 매길 수 없습니다. 새벽의 40분은 정말... 하 정말... 다들 공감하실 테니 이 정도로 어필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셋째로 마음껏 물어볼 수 있다! 대학원에 2년 동안 있으면서 스스로 공부하는 법에 도가 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글링(googling)을 안 하면 핑거프린세스(finger princess)라는 별명이 붙거든요. 핑거프린세스, 핑프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게으른 공주님'으로 공대생 사이에 종종 쓰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연수는 강사님이 50분 동안 강연을 해주시면 10분 동안 마음껏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쉬는 시간마다 나가서 질문하는 '질문폭격자'가 되었습니다. 구글링을 하면 '혹시 억측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들 때가 있거든요.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고 확장된 추가 설명까지 들으면 속이 뻥 뚫려서 시릴 지경이에요. 아 추워.


이렇게 평생 연수를 받고 싶지만 딱 하나의 단점이 있습니다. 바로 점심이 정말 정말 맛이 없다는 것. 사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데 저희 회사에서 공짜로 먹는 뚝배기불고기, 갈치조림 따위의 호화스러운 점심에 맛이 들린 저는 나물과 쫄면이 반찬으로 나오는 7천 원짜리 급식을 먹을 수 없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시락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지금 벌써 한 달째 도시락을 싸다니고 있어요. 아우 기특해라. 사실 저는 요리를 꽤 좋아하는 미식가 이거든요. 엄마가 뽑은 우리 집 장금이가 바로 접니다. 엣헴. 첫째 주에는 옛날에 사서 냉동실에 모셔둔 토르티야를 처리하기 위해 브리또를 만들어먹었고, 그다음 주는 식빵을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먹었습니다. 이때 사둔 양상추와 계란을 빨리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셋째 주까지 샌드위치를 고수해야 했습니다. 이상하게 샌드위치는 안질리더라고요. 아니요? 질렸습니다. 2주를 먹으니까 질려버렸어요. 그래서 어제부터는 밥류를 만들고 있습니다.

떡갈비김밥.. 근데 이제 밥을 되게 많이 곁들인
후식까지 챙기는 센스

어제는 청양고추를 넣은 떡갈비김밥을 먹었고, 오늘은 똑같은 메뉴로 떡갈비주먹밥을 만들었어요. 심지어 청포도까지 챙겨서요. 정말 맛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밥도 많고 싱거워 보이지만 감칠맛이 호롤롤로 라고요! 저 정말 일품 요리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시락의 포인트는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 반나절동안 냉장고에 있지 않아도 상하지 않을 것. 또한 전자레인지에 뎁히지 않고 미지근하게 먹어도 맛있을 것. 은근 고려해야 할 것이 많지요? 그런 의미로 냄새가 강한 찌개와 카레는 탈락입니다. 불어버리는 면도 탈락이고요. 식으면 굳어버리는 떡볶이도 탈락입니다.

다음 주에는 무엇을 만들어 볼지 고민입니다. 냉동돈가스가 있는데 가츠동을 만들어볼까요? 아니면 감자볶음밥에 문어소시지를 만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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