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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Sep 27. 2022

돌멩이가 속삭일 때 너를 생각해

열다섯을 쓰다듬어

‘만일 나에게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이라는 질문에 열다섯 소녀들은 놀이공원 가기, 친구랑 캠핑 가기, 여행 가기, 콘서트 가기, 드라마 정주행 하기와 같은 것들을 말한다. 싱그러운 녀석들. 싱그럽다고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반질반질 햇살에 반짝이는 초록 잎사귀 천지다. 존재 자체가 발광(發光) 중이다. 이토록 초록이 풍성한 와중에 소녀 J가 눈에 띈다. 눈에 띄지 않아서 눈에 띈다. 무성한 초록들 틈에 J는 가을을 닮아 있다.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J는 밤마다 장기를 둘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캐리커처를 그려보자고 했을 때, 소녀 J는 조그만 상자를 그렸다. 새장처럼 보이기도 한 그곳에 자기가 들어있다고 한다. 여느 열다섯 소녀들처럼 귀엽고 깜찍하거나 익살스럽게 자신을 그려 넣지 않는다. J는 대체로 책상에 앉아 있다. 가끔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노트에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다. 온통 재잘거리는 소리에도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다.      


 쉽사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은 J가 어느 날 글을 썼다. 반 전체가 공유하는 ‘생각 노트’에 자기 자신이 돌멩이 같다고 적었다. 갈색 돌멩이라고 했다. 깨지지 않는 돌멩이가 되고 싶다고, 꿈도 희망도 자신도 깨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수없이 구르고, 부딪혔을 J의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이 세상 그 누군가가 날 무시하고 발로 차도 깨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빨강 돌멩이처럼 눈에 띄지도 않고, 빛나지도 못해 치이고 다니는 갈색 돌멩이지만 나에게도 꿈이 있다고 적었다. 언젠가 반짝반짝 빛나는 돌멩이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매일매일 자신을 닦을 거라고 했다.    

 

 J의 글을 종례 신문에 실었다. 반 아이들에게 날마다 발행하던 A4 한 페이지 정도의 일간지에 ‘갈색 돌멩이’라는 제목의 글을 담았다. 그리고 그 밑에 ‘선생님이 J에게’라는 글을 덧붙였다.

 선생님은 J의 갈색 돌멩이가 마음에 든다. 갈색 돌멩이는 빨갛고, 파랗게 뽐내지 않고, 정겹고 다정하게 느껴져. 언젠가 반짝반짝 빛나게 될 갈색 돌멩이를 기대해.     


 종례 시간에 종례 신문을 받고 J는 조금 놀라며 나를 보았다. 나는 J의 수줍은 두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가끔 뒷산을 오르며 J를 떠올린다. 정확하게는 뒷산을 올라가다 만나는 돌멩이들 앞에서 J를 생각한다. 산을 오를 때면 뜻하지 않은 곳, 상상하지 못한 곳에 궁둥이 붙이고 앉은 돌멩이들을 만나게 된다. 나무줄기 움푹 팬 곳에 쏙 들어가 앉은 돌멩이, 루프가 연결된 나무 말뚝 위를 살포시 올라탄 돌멩이, 산길 가장자리에 소복이 모여 있는 돌멩이들, 아무 데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곳에 쌓여있는 돌탑들. 모두 누군가의 손길이 머문 흔적이다.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흔적이다.     


 뒷산에 자주 오르지만, 돌멩이들이 있는 자리에 사람이 머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대체 저 돌멩이들은 누가 옮겨놓은 걸까. 언제, 어디서 온 어떤 이의 손길인 걸까. 내 눈엔 거칠고 못난 돌멩이투성이인데, 요 반질반질 예쁜 것들을 어디서 주워온 걸까. 낯설게 느껴지니 예쁘게 보이는 걸까.    

  

 산을 오르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턱 막혀서 아이고 죽겠다 싶을 때, 혼자 오르는 산길이 유독 적적하다고 느껴지는 날에,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있는 돌멩이와 마주치게 될 때면 피식 웃음이 난다. 돌멩이가 “짜잔 나 여기 있지”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산을 오르는 우리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의 진짜 소망이 거기 담겨 있는 것 같다. 산을 오르면서도 자꾸 생각나는 간절한 바람을 돌멩이 안에 넣어둔 것 같다. J는 잘살고 있을까. 여전히 자신을 닦고 또 닦고 있을까.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반질반질 탐스러운 돌멩이가 되었을까. 어딘가에서 반짝이고 있을까.      


 J와 함께한 12월에 ‘한 해를 마감하며’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J는

좀 새로웠다.
어제까진 즐겁고
오늘부턴 쓸쓸하다.


라고 적었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J의 어제는 수많은 오늘이었다. 오늘을 즐겁게 보내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 잠시 쓸쓸할 것이지만, 곧 즐거워질 것이다. J는 누구보다 튼튼하게 마음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J의 손을 꼭 잡고 뒷산을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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