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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Oct 22. 2020

외할아버지, 머리 말려주세요.

경상도 사나이 친정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이이잉 위이이잉-
 해 질 무렵, 외할아버지는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6살 외손녀의 머리카락을 말리신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저녁 식사를 마친 외손녀는 엄마와 샤워를 하고 나와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가서 앉는다. 그러면 외할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셔서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외손녀의 긴 머리카락을 말리신다. 하루를 달려온 해가 뉘엿뉘엿 창을 붉게 물들이고, 집안은 위이이잉 헤어드라이어 소리로 꽉 채워진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볼 때마다 낯선 풍경이다.




  어린 시절, 두 살 터울의 쌍둥이 남동생들과 나, 우리 삼 남매는 조용할 날이 없었지만, TV에서 9시 뉴스가 시작되면 찍소리 하지 않고 하던 일을 멈췄다. 뉴스가 끝나거나 아버지가 채널을 돌릴 때까지 작은 방으로 모여 조용히 놀았다. 생각해보면 자라는 동안 아버지가 우리 삼 남매에게 큰 소리를 치거나 혼을 낸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에게는 혼나고 매 맞는 일이 일상이었고, 티끌 만한 잘못이라도 엄마에게 서로 일러바치기에 바빴다. 따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삼 남매는 아버지에게는 고자질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안의 어른 같았고, 같은 집 안, 한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늘 바쁘고 분주해 보였고, 아버지는 늘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신중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어른. 어린 시절 내게 친정 아버지는 그런 어른이었다.


 6살 무렵 가족이 함께 외출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인도를 벗어나 차가 지나가는 도로로 뛰어 들어갔고, 그때 아버지는 달려와 무섭게 화를 내셨다. 아버지가 화를 내실 땐, 우리 삼 남매가 생과 사를 오가는 장난을 치거나, 인간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인륜적 행위 비슷한 것을 할 때였다. 안동에 살고 있는 안동 권 씨 성을 가진 친정 아버지는 뼈 속까지 유교 정신이 깃들어 있는 안동 사나이였다. 엄마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 내와도 맛있다 하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정말 입맛에 맞는 음식이 나올 때면 "멀-만 하네(먹을 만하네의 안동 사투리)."라고 하셨다. 또 음식은 걸어 다니면서 먹는 게 아니니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땐 길거리 음식도 못 먹었다. 길을 걷고 있을 땐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도 먹지 않았다. 동네 친구들이 핫도그나 쥐포 같은 간식거리를 먹는 게 부러웠다. 평소 말수가 적으셔서 농담 같은 것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내려올 땐 천천히 내려오고 올라갈 땐 빨리 올라가는 것은?'이라고 딱 한번 우리 삼 남매에게 퀴즈를 내셨는데 정답은 '콧물'이었고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엄마는 늘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아버지처럼 인생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에게 함부로 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어렸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무뚝뚝하고 친근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아버지는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남녀차별이라는 케케묵은 관념을  굳이 가르치려 하지 않으셨지만, 본인의 삶에서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주방에 들어 가시는 것을 보지 못했고, 원래 음식을 못 하시는 줄 알았다. 중학생 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아버지는 주방에서 두부를 부치시고, 계란국을 끓이셨다. 못하시는 게 아니었다. 바깥일은 남자가,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것이었다. 자라는 동안 내가 여자라서 차별받고 있구나라고 느낀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고3 수능을 치고 나서였다.


 2001학년도 대입에는 정시와 특차가 있었다. 특차는 정시 지원 전에 수능 점수만으로 원하는 대학에 미리 원서를 넣는 것이었다. 나는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적당한 대학의 특차 원서를 담임선생님과 작성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당연히 허락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는데 아버지는 "안동에 남거라."라고 말하셨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가까이 있는 대학의 행정학과에 진학해서 공무원 시험을 쳐서 공무원이 되는 것이 아버지의 플랜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아버지가 내 인생에 제동을 걸었다.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결국 특차 원서도 못 내고, 담임선생님께 혼이 나고, 집에 남게 되었다. 그날, 긴 시간 울며불며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추운 겨울 주황색 파카를 입은 여고생은 가출을 시도했으나 차가운 칼바람에 서글픈 귀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체감하고 있던 것 이상으로 우리 집 가정 형편이 더 어려웠던 걸까, 공무원 월급으로 삼 남매 교육시키는 것이 넉넉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대학 가서 알바를 하거나, 학점을 잘 따서 장학금을 받거나 뭐든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세상이 너무 험해 철 모르는 딸자식을 객지로 내보내기 망설여지셨던 걸까. 그도 아니면 단지 내가 딸이었기 때문이었던 걸까. 공부에 큰 뜻을 품은 것 같지도 않고, 적당한 성적으로 자유와 독립이 목적이었던 딸의 대학 진학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적자 운영이라고 결론을 내리셨던 걸까. 내가 맏딸이 아니고 맏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라서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나는 82년생 권지연이 되었다.(나는 82년생이다)


  친정 아버지는 조금 일찍 명퇴를 하셨다. 가족 모두의 권유와 부탁에 의한 명퇴였다. 사람이 마음을 다치면 어떤 표정으로 어떤 하루를 살게 되는지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늘 생각하고 고민하던 아버지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목과 등은 항상 단단하게 굽어 있어 버섯 같다고 생각했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은 굽은 등을 더 무겁게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엄마와 삼 남매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어렵사리 명퇴를 결심하시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으셨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러니까 외할아버지는 외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조금씩 변하셨다.




 임신 중이었을 때 친정에 가서 아버지, 담배 끊어요. 담배 피우시면 나중에 아기가 싫어해요.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시는 게 걱정이 되어 담배를 숨겼던 적이 있었다. 담배 끊으시라고 말씀드리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괜찮다며 나중에 끊겠다고 말씀하시던 바위처럼 단단한 어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아이와 함께 친정에 갔다. 아버지가 담배를 끊으시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담배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이 앞에서만 담배를 피우시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지 않으셨다. 외할아버지는 거짓말같이 담배를 끊으셨다. 외손녀를 품에 안기 위해 평생 친구였던 담배를 끊으신 것이다. 그때 난 앞으로 아버지에게 더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로서, 외할아버지로서 해주실 수 있는 아니, 해주실 수 없을 것 같았던 최고의 선물을 하셨구나 생각했다.


 지금 친정 아버지는 우리 집에 함께 계신다. 딸의 육아를 돕기 위해 출가한 딸네 집으로 오셨다.

 나의 육아 휴직이 끝날 무렵, 복직을 앞두고 남편이 갑작스럽게 발령 통보를 받았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나 혼자서 육아와 일을 감당할 수 없었고, 소식을 들으신 친정 엄마는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친정 아버지와 함께.


 나는 일하는 엄마로서 하루를 두 번 살고 있다. 직장에서 감당할 몫을 마무리하고 퇴근하면 그때부터 엄마로서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이미 에너지가 바닥이 난 날도 있지만 배터리를 충전할 여유가 있을 리 없으니 깜빡이는 배터리 부족 상태 그대로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그날도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밥을 먹이고 머리를 감기고 샤워를 시켰다. 씻기고 나면 로션을 발라 주고 춥지 않게 얼른 옷을 입히고 머리를 말려 주어야 한다. 헤어드라이어 전원을 켜고 딸아이 머리를 말리기 시작하려는 순간, 핑- 하고 어지러웠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씻기고 나서 잠시 핑 돌기도 한다. 그때 친정 아버지가 거실에 나오셨다.

아버지, 담이 머리 좀 말려주세요.


너무 피곤했던 터라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 내가 할 수 있나 모르겠네..


주춤하시더니 헤어드라이어를 드셨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외손녀의 긴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혹여 뜨거울까 조심스레 머리를 말리신다.

 욕실로 돌아와 목욕 용품들을 정리하면서 아버지가 내 머리를 말려 주신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가 머리를 말려준다는 생각만으로도 어색하다.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신 후로 집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예전보다 서로 격이 없어지긴 했다. 살아온 시간과 방향이 달라서 대화가 시원스레 통하진 않지만 그래도 눈 마주치고 이야기할 시간이 늘어났다. 그렇다 해도 친정 아버지가 딸내미 젖은 머리를 말리는 상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거실 상황이 궁금했지만 나가보지 않았다. 외손녀의 머리를 말리시며 경상도 사나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낯설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이상하고 웃음이 났다.

 그날 이후 외손녀 머리를 말리는 일은 외할아버지 담당이 되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씻기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외손녀의 머리를 말리시고 빗으로 곱게 빗어 주시기도 하신다.


 외손녀는 나와 달리 외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만만하다. 엄마 눈치는 봐도 외할아버지 눈치는 보지 않는다. 외할아버지 이리 와봐, 내 어깨 잡고 따라와 기차놀이 하자, 외할아버지 건강에 안 좋으니 커피는 하루에 두 잔만 마셔, 외할아버지 배가 너무 뚱뚱해 운동 좀 하세요.. 종알종알 할 말도 많다.


 자동차보다 더 느린 것은 자전거 자전거, 자전거보다 더 느린 것은 달팽이 달팽이, 달팽이보다 더더 느린 것은 외외외외외외외할아버지.. 딸이 개사해서 제일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딸아이는 친정 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안고, 뽀뽀도 하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외할아버지는 외손녀와 폴짝폴짝 뛰기도 하신다.


  지금도 아버지는 여전히 경상도 안동 사나이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신다. 집 앞에 산책을 가시더라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대충 입지 않으시고,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나에게, 설거지는 니가 해야지 왜 이서방을 시키냐고 나무라기도 하신다. 그래도 아버지는 외손녀를 위해 평생 끊지 못할 것 같았던 담배를 끊으셨고, 식사 때는 행주로 식탁을 닦으시고, 반찬을 나르시고, 그릇을 치우시고, 매일 저녁 외손녀의 머리카락을 말리시고 곱게 빗어 주신다.


 아이를 키우며 육아 일기를 쓰듯, 친정 아버지와 함께 살며 겪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생각했다. 남편의 갑작스런 발령 통보로 인생 한치 앞도 볼 수 없구나 절망했고, 한걸음에 달려오신 친정 부모님께 죄송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작스럽게 발령이 나서, 요즘 나는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우리가 다시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엄마에게 혼이나 울고 있는 딸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달래주기 위해 애쓰시는 늙어가고 있는 아버지를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또다른 빛깔로 덧칠해지는 순간을 보며 조용하고 숙연하게 공감하고 지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순간을 함께해서 참 다행이다.

 어릴 때 가지고 있었던 아버를 향한 어른 환상은 깨진 지 오래다. 예상치 못 했지만 우리가 다시 함께 살기에 서로 천천히 변하고 있다. 비 맞고 바람 맞으며 바위도 조금씩 깎인다. 이래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했나 보다. 흔들리고 비틀거리고 더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을 허우적대더라도, 살다보면 가끔은 욕심내지 않았던 달달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 일단은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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