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개수로에서 관계를 생각하다

feat. 저녁 8시에 집을 나간 엄마

by 바람코치 신은희

어젯밤도 두 시간 가량 밖에 눈을 못 붙였다. 매주 금요일까지 마감인 콘텐츠 개발 프로젝트가 이어지고, 토요일 오전 7시엔 한달에 한번 있는 코칭핵심역량 스터디가 있고... 매일 쳐내야 할 일 투성이다. 욕심의 가지가 내 주제를 모르고 자라나서 바람 잘 날이 없다.


주말은 비로소 가족 네 명이 복닥복닥 하루종일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날이지만,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엄마출근을 하드코어로 하는 날이기도 하다. 좋게 말하면 내 사랑을 지나치게 갈구하는 아헤 셋이 돌아가며 퀘스트를 읊어대는 48시간인 것이다.


나는 엄마지만, 그건 부캐다. 본캐는 그냥 '나'인 것이다. 코로나 덕분에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내가 의외로 산토끼가 아니라는 것. 돌아다니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 만나기보다, 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좋다.


엄마일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처음 본 사람과도 스스럼 없는듯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냥 '나'는 바람같이 다니는게 좋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남편과는 의논할 일들(이라 쓰고 지 용건 이라 읽는...)이 끊이지 않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필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나와 데이트 하는 시간이 나는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라 나는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40년을 남에게 주파수를 피나게 맞추며 살았다. 남의 관심을 바라고, 인정을 원하고, 그러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걸 다 해줬다.


그러다 주객이 전도됐다. 어느순간부터 나와 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라고 퉁친 이름(때론 주로 너님만)만 남고 '나'는 사라졌다.


과거의 나는 다시 찾을 수 없다. 내 삶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며느리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 외에 수많은 역할들을 짊어지며 모래주머니 달고 훈련하는 운동선수처럼 꾸역꾸역 고된 훈련을 견뎠다.


생각해보면 굳이 '나'를 누르면서까지 그렇게 책임들을 지켜나갈 필요가 있었나 싶다. 매사 최선을 다하니 생산성은 올라갔지만 '나'라는 본캐의 에너지는 새어나갔다.


난 이제 더 이상 새 휴대폰이 아니기 때문에 충전이 빨리 되지 않는다.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일하다 말고 드럼 레슨을 가고, 업무는 밤샐 정도로 남았지만 그림을 그리며 템포를 늦춘다.


그리고 혼자 걷는다.

아직 싸리싸리한 아침에, 어스름한 해질녘에, 애들 다 재운 한밤중이라도 나를 위해 걷는다.

소진되었다 느낄 때일수록 나와의 관계회복이 우선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와의 데이트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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