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 Jul 17. 2023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사랑받으려고 애쓰지 말자

 아이를 왜 낳고 싶냐는 질문에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대신에 인생이 더 풍성해질 것 같아서, 노년에 외롭지 않기 위해서, 대를 잇기 위해서, 나를 닮은 아이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 아이가 좋고 엄마가 되고 싶은 로망이 있어서, 그래도 아이는 낳아야 할 것 같아서 등의 다양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싶다. 이 노래를 마주할 때면 현실이 부정당하고, 거짓으로 위로하는 것만 같아 불편한 마음이 밀려든다.


 엄마는 나를 낳기 전 태몽으로 가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낳자마자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이유는 가지 꿈과 함께 온 자식이 으레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간절히 바라왔는데, 낳고 보니 가랑이 사이에 달려있어야 할 것이 행방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당시 옆에 있던 이모들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와 함께 통곡했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아빠는 ‘꼴값한다(아빠의 표현이다)’고 했고, 역설적으로 내 이름을 ‘참 기쁘다’는 뜻을 담아 지었다. 내 이름은 모두가 구슬피 우는 상황에서 ‘네가 태어나서 참 기쁘다’는 아빠의 의지적 애정이 담긴 이름이었다.


 반면에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도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미련의 흔적은 어릴 적 사진첩을 보면 여실히 남아있다. 남아처럼 짧은 머리에 남아 같은 복장.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나는 존재만으로 엄마를 서럽게 울린 겸연쩍은 ‘딸’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태생의 이유는 일차적으로 부모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부모를 위해 태어난다. 물론 일부 말도 안 되는 부모들이 아이를 낳고 책임을 회피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으로 아이는 부모를 위해 태어난다.


 그렇다면 세상에 온전히 사랑받기 위해서만 태어나는 존재가 있을까? 아직 존재가 형성되기도 전인데, 어찌 대상도 없이 사랑의 감정이 먼저 생길 수 있으랴. 사랑은 목적이 아닌 결과로 온다. 사랑하기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았더니 자연스럽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딸려 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기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면 우리는 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괴리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다 보면 늘 애정을 갈구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할 것만 같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삶을 살면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감언은 결국 기저에 철저히 ‘타의적 삶의 지향’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우리는 일차적으로 부모에 의해 태어난 게 맞지만, 이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로부터 잘 독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미국 비즈니스인사이더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IQ,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교육 수준 등의 요소를 능가하는 게 있었는데 바로 아이의 ‘반항적인 성격’이었다. 부모로부터 독립성을 지니고 더 일찍 자신만의 길을 찾을수록 성공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자식뿐만 아니라 부모 또한 마찬가지로 자식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 얼마 전, 배우 이하늬의 팬들이 그녀에게 “육아 콘텐츠 찍을 계획 없냐”는 질문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그녀의 답변은 꽤 인상적이었다.


 “나한테는 딸을 공개할 권리가 없다. 딸도 딸만의 삶이 있다. 딸이 나한테 왔을 뿐이지, 내가 이 아이를 소유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이 아이가 세상에 와서 잘 살아가게 도와주는 헬퍼 역할을 하고 싶은 사람이다.”


 아직 작고 어린 딸이지만, 딸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그녀의 태도가 존경스러웠다. 자식을 소유물로 보지 않고, 자식의 삶을 오롯이 지지해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이런 엄마라면, 나도 그녀의 딸이 되고 싶었다.


 내 경우, 부모님의 말씀을 잘 안 듣는 아이였고, 학교에서는 손꼽히는 반항아였다. 목회로 늘 바쁜 부모님의 양육 방식은 ‘자유방임주의’였고, 내가 뭘 한다고 해도 크게 뭐라 하지 않으시니 우리는 나름 장단이 잘 맞았다. 오히려 내가 잘못된 길로 갔다가 낭패를 보고 돌아와서는 부모님께 “그때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 여쭤보니, “직접 실패해 보고 깨져봐야 배움도 있는 법이지”라며 덤덤히 이야기하셨다.


 부모님의 전폭적이지 않은 지원 덕분에(?) 나는 자립심이 생겼고, 인생에서 잘 살아남는 나만의 방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사랑받기 위해 타인이 원하는 선택, 특히나 부모가 원하는 선택을 억지로 하지 않았으면 한다. 기꺼이 자신만의 길을 찾는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언제 어디서든 내 인생에 간섭하려는 누구에게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올차게 말할 수 있기를.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라

자발적인 추방자가 돼라

너의 인생의 모순들을

숄처럼 몸에 두르라

날아오는 돌들을 막고

너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환호하며

광기에 굴복하는 것을

지켜보라

그들이 의심의 눈으로 너를 보면

너도 의심의 눈으로 화답하라


추방자가 돼라

초라해 보여도

홀로 걷는 것을 즐거워하라

아니면 혼잡한 강바닥에서

성급한 바보들과

줄을 서야 한다


강둑에 모여

즐거운 파티를 열라

그들이 내뱉은

과격하고 고통스런 말들로

수천명이 멸망한 그 곳에서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라

추방자가 돼라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 자격을 얻으라


- 앨리스 워커의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라> 중에서 -



사진: UnsplashKeith Hard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