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고분하라고? 너나 고분고분해라
지인은 ‘동남아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왜요?”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요즘 한국 여자들이 까탈스럽고, 예민해서 연애하기 힘들다고 했다. 차라리 순수하고, 남자의 말에 고분고분한 동남아 여자와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고.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자가 왜 남자의 말에 고분고분해야 해?’ 그의 말은 단순히 자신의 취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의 관계를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정의하는 것으로 보였다. 집에 와서도 동료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곱씹어봐도 정말 별로였다.
수년 전, 한 토크쇼에서 어떤 남성 출연자가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라는 발언을 하는 걸 보았다. 심지어는 “남자가 바람 필 수도 있는 거지!” 라는 말까지 해서 여성 방청객들의 야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 남성은 야유를 받고도 오히려 여성 방청객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어이없었다. 전통적인 남성 우월주의 사상이 박제된 채로 그의 몸에 딱 붙어 전시되어 있었다.
이후에 김혜수가 진행하는 <김혜수의 플러스유> 토크쇼에서도 이 남성이 출연하게 되었고, 이전과 같은 발언을 이어갔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지. 이 말에 광분하시는 분들은 좀 단순하신 것 같아요. 하늘과 땅은 공존하는 거잖아요.” 이에 김혜수가 다음과 같이 맞받아쳤다. “그럼 여자가 하늘, 남자가 땅. 이 말도 가능하겠네요? 서로 공존만 하면 되니까.” 남성 출연자는 멋쩍게 웃으며 최악의 발언을 했다. “아무래도 옛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 그대로…남자가 하늘이죠.”
이후 김혜수는 웃으면서 똑 부러지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남자는 하늘? 맞아요. 공감해요. 그리고 여자는 우주고.” 김혜수의 재치 있는 발언에 이 남성 출연자도 민망한 듯 크게 웃어넘겼다.
성별을 떠나서 “고분고분하게 굴어.” 라는 말은 예외없이 늘 폭력적이다.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억압하고, 상대를 움츠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남녀 관계 외에도 권위주의적인 관계에서는 주로 나오는 말로, 직장이나 학교, 부모와의 관계,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내 친구의 엄마는 친구에게 “그냥 하라면 해.”라는 말을 종종 하셨다. 친구에게 머리로 이해를 시켜준다거나, 가슴으로 울림을 주는 일은 없었다. 어느 날은 친구가 엄마의 말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라고 반박했는데, 엄마가 어디서 대드냐고 숟가락으로 친구의 정수리를 세게 때렸다고 했다. 밥 먹다가 숟가락으로 맞은 그날의 설움은 어른이 되어서도 잊을 수가 없다고.
그런데 고분고분하라는 말은 사실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알량한 권위는 가지고 있지만, 너를 설득할 논리도 없고, 너의 가슴을 울릴 감성도 없으니, 본인의 무지와 무능력을 대강 덮으려는 게 아닐까 싶다. 아직 어려서 판단력이 흐린 아이에게야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왜 그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유는 알려줘야지, 이유 없는 강요는 정서적 학대로 이어진다.
만약 주변에 자꾸 상대를 통제하려 들고, 고분고분하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가엽게 여기고, 가볍게 흘려듣길. 세상에 고분고분해야 하는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