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한 인격체로 봐준다는 것
“우리는 친구의 와이프가 아니라, 이채라는 한 사람과 교제하고 싶어요. 이채씨만 괜찮다면요.”
결혼 후, 집들이에서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내게 한 말이었다. 그들이 결혼식에서 불러준 특별한 축가, 집들이를 위해 준비한 특이한 선물, 그들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내 예상을 빗나갔지만, 이 말이 가장 예상 밖이었다.
전대미문의 위로가 심장 전체를 관통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목사 딸’이라는 수식어를 들어오며 누군가의 장식품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는데…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의 나와 사귀고 싶다니! 그들의 특별한 선언에 갑자기 안구의 깊숙한 곳이 뜨거워졌다. 거실에 켜놓은 무드 등만큼이나 마음이 몽몽하고 따뜻하게 젖어 들었다.
반면에 그들을 ‘남편의 친구’로만 보려고 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남편도 평소 나를 와이프, 아내라는 관계적 호칭보다 내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고 했는데 물이유취가 맞다 싶었다.
본가에 가면 부모님이 서로를 ‘누구 아빠’, ‘누구 엄마’라고 부르곤 했다. 물론 가끔 상대방이 당신의 뜻대로 안 되면 상대방의 이름 석 자를 크게 호령할 때도 있지만, 일상적인 호칭은 누구 아빠, 누구 엄마였다.
아빠와 엄마라는 역할의 무게가 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식이 너무 중요한 나머지 자식의 이름을 중심에 둔 삶을 산다는 걸 내포하고 있는 건지. 그들의 이름은 지워지고, 그 자리는 어느새 역할적 호칭이 차지했다. 이 때문에 나도 부모님의 이름을 한 번씩 꺼낼 때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가게인데 처음으로 가게의 이름을 눈여겨본 것처럼.
최근에는 결혼하면서 내 이름도 흐릿해지는 걸 경험했다. 결혼이라는 거대한 제도 안에서 내게는 새로운 호칭이 여러 개 생겼다.
시댁에서는 시부모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이번에 결혼한 누구 와이프래요” 혹은 “누구 엄마 며느리래” 등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을뿐더러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펜션을 잡아서 같이 먹고 노는 동안에도 내 이름을 모른 채 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펜션 방 한쪽에 수명이 다해 불이 들어오지 않는 등마냥 내 이름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반대로 남편의 친척들도 본인을 소개하는데 “나는 누구 큰 삼촌이야”, “나는 이모야”, “전 사촌 누나예요” 등 아무도 본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알려주지 않아서 애먹었다. 아차 싶었다. 호칭을 미리 알고 갔어야 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이름을 알려주면 편할 텐데. 한국의 호칭 문화는 사회적 낭비라고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이해되었다.
명확한 호칭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탓에 나는 그 자리에서 누구도 부를 수가 없었다. 그저 남편 옆에 딱 붙어서는 속으로 남편이 좋은 대변인이 되어주길 바라고만 있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남편은 좋은 대변인이었다.
우리는 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까? 한 사람을 사람으로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로서만 기억하고 끝나버린 그 자리가 씁쓸했다. 위치는 대략 알지만, 명확한 이름은 모르는 가게처럼 우리는 서로의 위치만을 탐색할 뿐이었다. 가게 이름을 모르니 나중에 다시 찾기도 어렵게 말이다.
얼마 전, 나는 형부를 이름으로 불렀다가 엄마에게 혼난 적이 있다. 형부와는 이전부터 알던 사이라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튀어나왔는데, 엄마는 형부에게 예의를 갖춰서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부르라고 했다. 그 순간 형부는 나와 독대가 가능한 독립적 인격체가 아닌, 그저 ‘형부(언니의 남편)’가 되어버렸다. 언니와의 관계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부를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는 홀로는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걸까. 한국이 얼마나 집단주의 사상이 강한지 확인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라는 울타리는 개인의 색깔을 흐릿하게 만든다. 이 울타리 안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기가 어렵다. 이 안에선 개인의 꿈보다는 집단에서 기대하는 역할이 명확하게 고착화되어 있어, 나의 의사보다 우선하여 집단의 기대를 충족해야만 할 것 같다.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며느리는 며느리의 역할을, 딸은 딸의 역할을.
자유분방함의 DNA를 숨기고 사는 나는 한국의 역할 호칭 문화보다는 외국의 ‘이름 부르는 문화’를 좋아한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고화질로 개개인이 선명해진다. 더불어 서로의 이름을 오롯이 불러줄 때면, 나이, 역할, 성별에 관계 없이 누구와도 대등하게 친구가 될 수 있는 마법이 시작된다.
그래서 수많은 호칭 속에서 내 이름이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 수식어 없이 존재하는, 역할적 편견 없이 존재하는 ‘이름’을 앞으로도 더 많이 불러줬으면 좋겠다. 나는 고유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고, 이름이란 것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니까.
당신의 이름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