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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Aug 14. 2023

진화한 사람만이 친절을 베푼다

그리고 친절은 또 다른 친절을 낳는다

 화창한 봄날의 토요일이었다. 꽃봉오리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은근한 햇살이 땅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기온은 딱 기분 좋게 따뜻했다. 나는 부모님과 외식하러 가는 길이었다. 부모님보다 조금 뒤처져 걸어가고 있는 내게 낯선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은행이 어느 방향이죠?”


 남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내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내게 말하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내 쪽을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흰 지팡이로 전달되는 촉각을 통해 길을 느끼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한 줄도 모른 채 고요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행은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주섬주섬 떨어진 간을 추스르며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잡아드려도 될까요?”


 그의 허락을 구하고 팔 안쪽을 잡았다. 그리고 은행 쪽을 바라보니 입구까지는 계단이 몇 개 있었고, 계단을 오르고도 방향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구조였다. 갑자기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측은지심 센터에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빨간 불이 들어왔다. 동시에 SOS 전보가 긴급하게 날아왔다. 부모님 쪽을 슬쩍 돌아보았지만, 전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헤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의 팔짱을 끼고 은행 입구까지 인도했다.

 

 완벽한 입장이었다! 그가 은행 입구를 넘어서는 걸 보고 나서야 흡족했다. 나는 다시 재촉하여 부모님께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마치 나를 기다리시는 듯 어느 때보다 천천히 걷고 계셨다. 


 걷던 길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좀 더 따스하달까. 좀 더 향기롭달까. 좀 더 활기차달까. 그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 것이 내게 정체 모를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어떤 유의 즐거움인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피어나려고 하던 꽃봉오리의 정체는 분명 즐거움에 가까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느낀 즐거움의 근원은 호르몬 작용 때문이었다. 타인을 돕는 행위를 하면 뇌의 보상 센터의 활동이 강화된다. 이때 세로토닌, 옥시토신, 도파민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들은 우리를 안정시키고, 기분을 고양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구체적으로 세로토닌은 만족감을 주고, 옥시토신은 안정감을 주고, 도파민은 행복감을 준다.


 결국 친절한 행동은 상대보다는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친절이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값진 선물인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줄 수 있는 유익한 선물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만족감을 얼마 만에 느꼈던지. 아마도 그 남자를 평일 출퇴근 시간대에 만났다면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치열한 서울살이에서 착한 사람은 손해보는 쪽이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간 나는 선택적으로 친절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런데 남을 돕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이라면, 남을 잘 돕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에게 잘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이렇게 생각을 하니, 고도로 진화한 사람만이 친절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얼마 전에는 친구와 함께 기버, 테이커, 매처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우리가 평소 다른 사람을 얼마나 잘 돕는지에 대해 떠올렸다. 친구는 자신이 기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진정한 기버는 자신이 주는 도움으로 인해 타인이 얻을 이익이 더 크길 바라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푼다고. 그리고 결국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의 기버라고. 그 친구는 누가봐도 확실한 기버였기 때문에 그 말은 다른 말로도 들렸다.


 “결국 나는 반드시 성공하는 사람일 것이다!”


 친구는 내게도 물었다. “너는 어떤 성향인 것 같아?” 그러나 확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확실히 기버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테이커도 아니고. 뭐랄까…과거에는 기버의 성향이었다가 여러 번 좌절을 맛보고 매처가 된 사람이랄까. 요즘의 나도 이따금씩 친절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행동의 대부분은 사심 가득한 친절이니 말이다. 


 진짜로 기버가 성공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기버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나에게 베풀 때, 혹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 나는 어떠한 울림을 받는다. 그리고 모종의 자극을 받는다. 나도 베풀면서 살아야겠다는 자극이다. 관용과 친절은 이처럼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이 관용과 친절이 당신에게도 전염되기를. 온세상에 전염되기를 소망한다. 



사진: UnsplashTanya Trofymch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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