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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Sep 15. 2023

‘실어증’이 아니라 ‘네가 싫어증’이다

네가 싫어서 말을 아끼는 것이다

 “내 결혼식은 호텔에서 할 거라서 네가 알려준 한복집은 급에 안 맞는 것 같아.”


 얼마 전 친한 동생이 친구에게 들은 말이라고 했다. 결혼 준비 중인 친구가 어머님들 한복을 어디에서 했냐고 묻기에 정보를 알려줬는데, 돌아온 건 업신여김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던 동생의 눈빛에는 옅은 분노가 배 있었다. 손으로 감싸고 있던 커피잔에는 유독 힘이 들어가 있는 듯 했다.


 사연을 더 들어보니 그 친구는 평소에도 결혼과 관련한 질문을 하는 척하면서 자기 자랑하기 바쁘다고 했다. 비싼 호텔에, 비싼 웨딩드레스에, 비싼 메이크업에, 비싼 스튜디오에, 비싼 예물까지 남김없이 과시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동생에게 결혼 예물로 뭘 받았냐고 물어봤는데, 정작 동생의 답변에는 관심 없고 본인의 샤넬 가방을 내보였다고.


 이뿐만이 아니었다. 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모바일 청첩장을 공유했을 때는 축하한다는 일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 난 뭐로 하지?”라고 했다고. 동생은 남아 있던 정마저 뚝 떨어졌고, 진지하게 이 친구를 손절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나라면 적당히 무시해버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하겠지만, 마음이 여리고 착한 동생은 왠지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결혼 준비하면서 일시적으로 그런 걸 수도 있으니 지켜보다가 정 아니다 싶으면 거리를 두라고 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할수록 그 친구의 자기중심성과 무례함에 경멸감이 들었다. 동생의 분노가 어느새 내 몸속까지 들어와 퍼진 듯했다.


 다시 덧붙였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또 그러면 그때는 그 친구에게 똑같이 대해줘 보라고.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 “너는 다이어트 하고 있어? 솔직히 비싼 드레스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딱히 할 필요가 없어서 따로 다이어트는 안 하는데~”, “너는 피부 관리하고 있어? 비싼 데서 메이크업 받으려면 급에 맞게 피부가 고급져야 할 텐데 말이야.” (동생은 날씬하고, 피부도 좋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똑같이 하는 게 치사해 보일지 몰라도 혼자만 고통받는 동생이 안타까워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언을 해줬다. 물론 진짜 의도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해서였다. 동생은 지금도 단톡방에서 한참 있다가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아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고 했다. 동생이 침묵하는 것은 ‘실어증’이 아니라 ‘네가 싫어증’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상대에 따라서 말을 안하는 경우가 있다. 주파수가 잘 맞는 사람과는 활기차게 대화하지만, 주파수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함구하고 있는다. 그럴 때면 상대가 눈치 없이 “외동이시죠?”, “내향형이신가봐요?” 라고 묻기도 한다. 외동도 아니고, 내향형도 아니다. 그냥 ‘네가 싫어증’에 걸린 사람이다.


 물론 괜히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은 경계하고, 상대를 이해해 보려 노력할 수 있지만, 싫어지는 이유가 명백한 사람(예를 들어, 반복적으로 무례하다거나, 불쾌한 섹드립을 계속 친다거나, 지나치게 강압적이거나, 도덕성이 결여된 말을 한다거나 하는 사람 등)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최근엔 새로운 모임에서 이상한 드립을 계속 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유부녀인 내게 앞에 앉은 남자와 러브샷을 하라고 권하기도 하고, 다른 여자분에게는 “지금 이 시간에 남자친구는 바람 피우고 있을 텐데”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꼭 마지막에 “아~드립이에요”라거나 “농담 농담”을 덧붙이며 재밌어했다. 재미 없음을 넘어서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나 싶어 시간이 아까웠다. 이 자리에 나온 걸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 같았다.


 웬만하면 상대의 말에 끄덕거려 주는 내 고개는 꼿꼿하게 굳었다. 말랑한 찰흙 같았던 내 마음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 사람 말의 대부분이 드립이다 보니 도무지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대화하면 할수록 기가 빨려 나갔지만,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여과기 없이 날 것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배출하는 것이 몹시 거북했으나, 여태까지 아무도 이 사람에게 무례하다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마음속에 도사린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돌려 까기를 시전했다.


 “대화의 결이 좀 특이하신 것 같아요. 요즘 시대에는 그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저희 때랑은 많이 다르네요.”

 

 속으로 외쳤다. ‘제발 즉각 시정해 주시오!’ 주변에서는 눈치를 보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정작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드립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서 활개 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분위기가 한 번씩 싸해지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남자분이 재빠르게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맞아요. 농담이죠~ 우리 가볍게 넘어가요~” 라며 받아치는데, 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지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당장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아니면 그 인간이 무안할까 봐? 그것도 아니면 본인도 같은 생각이라서?


 이후로 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실어증이 아니라 ‘네가 싫어증’. 언행이 부적절한 상대에게 경고하는 것은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알아듣지 못한다면 더 이상 억지로 웃어주지 않는 것, 그리고 애써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어막이다.


 더불어 주변에서 누군가의 불편함을 인지했다면, 어물쩍 넘어가기 위해 동조하는 행위는 멈췄으면 한다. 당장의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은 막았을지 몰라도 누군가의 마음은 더욱 싸해질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싸해진 누군가는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 UnsplashUgur Akdem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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