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직시하기로 했다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사실을 직시하라.
그것이 당신을 변하게 할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 -
학창 시절, 한 남자애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이유로, 내게와 화풀이로 욕한 적이 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벙쩌서 듣고만 있었다. 그리곤 집에 왔는데 갑자기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솟아올라서 방 안에 틀어 막혀 한참을 울었다. 엄마는 “누가 욕하면 너도 같이 욕해버리면 그만이지, 그걸 왜 집까지 들고 왔어!”라며 나무라셨다. 안 그래도 억울한데 설움까지 더해져서 눈물 줄기가 더 굵어졌다.
그때 나는 왜 반격하지 못했을까? 갈등을 싫어하는 내가 그 자리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에 ‘싸우기’는 없었다. 최선은 ‘가만히 있기’, 그리고 차선은 ‘울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왜 이렇게 참고 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 것은 분했다. 그러나 정면으로 돌파하는 건 더 고된 일이었다. 여태껏 한 번도 제대로 부딪혀 본 적이 없으니, 만약에 정면 돌파했다가 내 세계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지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엄마의 말처럼 진짜로 같이 욕해도 되는지 헷갈렸다. 동화책에서든 교과서에서든 ‘싸우지 말라’는 가르침은 늘 노골적이었고, 나는 수년간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싸워도 된다는 쪽으로 마음이 조금이나마 기운 건 스무 살이 된 이후였다. 당시 나는 재수를 하고 있었고, 이 시기에 영어 과외를 해주시던 선생님이 내게 ‘회피 성향’이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선생님이 보기에 문제를 일으킨 게 무엇이고,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취한 행동이었다. 선생님은 종종 “도망치지 말고 싸워.”라고 말하셨다. 그러나 나는 매번 고집스럽게 도망쳤다. 그리고 이 성향은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이어졌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이 문제가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내 주변에도 나와 비슷한 성향을 지닌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내 가족 중에는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남들 부탁을 들어주느라, 정작 본인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동창은 남들에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걸 어려워했다. 편의점에서 간식을 고를 때도 상대가 고르는 걸 보고는 따라서 골랐다. 식사로 어떤 메뉴가 좋을지 이야기할 때도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직장에서 한 동료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렀다.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걸 꺼려했고, 감정을 표현하는 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나를 포함해서 자신을 좀처럼 내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남들을 신경 쓰느라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걸 쟁취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사람들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애쓰고, 갈등을 피하고, 어떠한 구속이나 책임도 싫어하다 보니, 인간관계에 있어서 쉽게 피로감을 느끼면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삶이 위축되고, 점점 더 진실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진다.
사실은 모든 인간관계엔 필연적으로 마찰이 있다. 그래서 갈등 자체를 거부하고 회피하면, 그 관계는 발전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에 갈등을 제대로 직면하고 해결해 나가고자 하면, 오히려 관계가 회복되고, 나아가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회피형 인간의 반격은 ‘투쟁’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 회복’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다양한 이유로 내 삶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회피형 삶을 살았던 과거의 탯줄을 끊고 ‘진짜 내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남을 의식하는 삶이 아닌,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을 직시해본다. 그것이 내게 참된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