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동 대표 체험기
‘보고, 듣고, 알고도 침묵하는 자 - 그도 역시 공범이다’
속으로 되새기며 P과장이 일어섰다.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 동 대표 회의는 무엇을 위해 있는 거죠?
제가 일 년 육 개월 재임기간을 돌이켜 보면, 수많은 공사와 계약만 기억에 남고 입주민들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제 말씀이 틀린가요?”
모두 P를 쳐다본다.
“10년간 제기된 이슈라고요?
아니, 그럼 10년간 해야 할 일을 서로 이리저리 회피해 왔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민이 문제점을 제기하면 파악해 보고 개선할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처음부터 회피할 생각만 하십니까?”
P의 열의는 가상했다.
하지만, 분위기 반전에는 아쉽게도 역부족.
“젊으신 분이라서 그런 말씀 하시는지 모르지만, 솔직히 그렇게 나서면 누가 알아나 줍니까? 사람 자르는데 앞장섰다고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니 뭐니 하는 뒷말이나 듣기 십상이지!”
“누가 사람 자르자고 이러는 겁니까? 우선 최소한 주민 의견이라도 물어서 다른 대안이 있는지, 주민 요구와 경비원 고용의 접점을 찾아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
마지막으로 용을 써보지만 아쉽게도 바로 묻혀 버린다.
“지나간 얘기지만, 이게 다 10년 전 동 대표들 잘못입니다.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때 마무리를 지었어야 하는데 그게 지금까지 와서... 참... 피해자는 우리야, 우리!”
“아,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까놓고 말해서 주민들이 이런 일에 관심이나 있습니까?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나서지도 않고.. 모두가 자기 일이라 생각했으면 일이 여기까지 왔겠어요?
지난주에 온 민원인 같은 여자가 서너 명만 있었어도 이 문제는 벌써 10년 전에 해결됐을 겁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일에 왜 우리가 나서 나서길...”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 아파트 상가는 동네 장사라서 그런 일에 앞장설 수 없어요. 이미지만 나빠져.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그러니까 젊으신 분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갑시다.”
아파트 도장 공사 추진 시에는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 입에 거품을 물던 하늘 부동산 사장은 이번에는 어깨를 움츠리며 약자 코스프레 모드로 돌변하여 P과장을 설득한다.
이번만은 도와주리라고 기대했던 ‘벤자민 아저씨’는 오늘도 아무 말 안 한 채 의미 없이 회의 자료를 뒤적이거나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본인 의사표시를 했다.
고립무원孤立無援. P과장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타성과 무책임으로 둘러쳐진 거대한 성벽 앞에 혼자서는 무력했다.
하기야, 저들에게 무슨 죄를 묻겠는가?
주인들이 스스로 자기 권리 포기하고 방치해버린 공간, 그 황무지를 그나마 지금까지 가꾸고 일구어 온 죄 밖에 없는데...
그다음 날부터,
연로하신 경비원들을 빨리 자르라고 회의실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는 괴 소문이 아파트 전체에 쫘악 퍼지면서 그 젊은 민원인과 3동 대표 P과장에게 ‘인간 백정’이라는 주홍 글씨가 덧칠되었다.
젊은 나이에 세상 물정 모르고 날 뛴 죄 값이었다.
P과장은 동 대표 임기를 5개월 남기고 차장으로 승진하면서 제주지점으로 발령이 났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고, 이국적인 정취를 맛보기 위해 가족 모두 이사 가면서 전세를 주고 회사가 운영하는 사택에 입주했다.
하늘 부동산 사장께서 그 소식을 잽싸게 낚아 채 전세 세입자를 데려와 거래를 성사시켰다.
P과장은 후임 동 대표를 찾고자 평소 관리비에 불만이 많았던 1층 아저씨를 찾아뵙고 설명을 드렸으나 ‘그런 큰일을 맡기에는 본인 역량이 부족하다’ 시면서,
또 같은 또래의 위층 주민은 ‘본인 사업이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모두 고사하였다.
하는 수없이, 엘리베이터 안에 3동 대표 후임자 공고 안내문을 부착하여 신청자를 찾았으나 아무도 응모하지 않아 결국 3동은 공석인 채로 임기 말까지 2동 대표가 겸임하게 되었다.
제주지점 사택 또한 아파트였다. 거기서는 아래층 주민이 동 대표였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울에서나, 제주도에서나 아파트 주민들의 참여의식은 거의 동일한 것 같았다.
2년 후, P차장은 다시 본사로 발령을 받아 원래 살던 아파트로 이사했다.
돌아와 보니, 그동안 말로만 무성하던 ‘재건축 추진 위원회’ 결성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위원회 임원을 선출하는 포스터가 단지 내 여기저기에 붙여져 있었고, 주민들 관심도 아주 높았다.
족히 10여 명은 되어 보이는 많은 출마자들이 사진과 함께 건축, 건설 관련 화려한 경력, 공약들을 제시하였다.
P차장은 출마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읽어 가던 중 어처구니가 없고 깜짝 놀랄만한 후보를 두 명이나 볼 수 있었다.
토요일 오전, 아파트 단지 옆 초등학교 강당에서 재건축 추진 위원회 임원 후보 연설 및 선출 투표가 있었다. P차장은 특히나 두 후보 연설을 듣고자 굳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참석했다.
한 후보는 P차장이 제주지점으로 가기 전 동 대표 후임자를 부탁드렸을 때 ‘그런 큰일을 맡기에는 본인 역량이 부족하다’며 고사하셨던 1층 아저씨였다.
그분은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에서 정년퇴직하여 아파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며 자신의 검증된 ‘역량’을 믿어 달라고 주민들에게 호소하셨다.
또 다른 후보는 동 대표 회의 기간 내내 거의 한마디로 안 하시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2동 대표 ‘벤자민 아저씨’였다.
그 침묵 아저씨가 이번에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마치 강당이 떠나갈 듯 피를 토하듯이 연설을 하셨다.
P차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분 연설을 한참이나 멍하니 지켜보다, 도중에 밖으로 나와 구름 사이에 살짝 비친 잿빛 하늘을 쳐다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2년 전 K부동산 사장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 올렸다.
‘동 대표 할 사람이 없다는 건 주인의식 결여라고요? 주인의식이라.... 주인의식... 저는 솔직히 장사꾼이라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모르겠구요.
한 가지 분명한 건, 동 대표는 먹을 게 없는 마이너리그니 초식草食동물이나 기웃기웃 거리지만, 재건축 추진 임원은 먹을 게 많은 메이저리그니 힘센 육식肉食동물들이 우르르 몰려들 겝니다. 그때 가서 보세요.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