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야기
“good shot!”
어둠이 채 걷히지도 않은 새벽녘,
사장이 휘두른 드라이버에 제대로 맞은 하얀 나이키 골프공이 공중을 가로질러 호쾌하게 하늘 위로 날아가 저 멀리 떨어진 잔디 위를 구르다 멈춘다.
사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골프공 위치를 바라본다.
나머지 세 명은 계속 “good shot”을 연이어 외치며 보스의 장타 실력을 칭송한다. 누구는 허벅지 힘이, 누구는 허리 힘이 사장님 장타 비결이라며 감탄을 한다.
네 명은 카트를 타고 홀과 홀 사이를 이동하거나,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움직인다.
이때, 사장은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한다.
거리를 측정하고, 우드를 사용할지 아이언을 쓸지, 아이언을 쓰면 몇 번 아이언이 좋을지 고민한다. 오직 샷을 정교하게 날려 골프공을 그린에 착지着地시키기 위해 한 타 한 타 온 정신을 쏟는다.
반면, 나머지 본부장 세 명은 두 가지 모두에 집중한다.
첫 번째는, 사장과 지근거리에서 그의 관심을 받는 것이다.
혹시라도 운 좋게 둘만의 공간이 만들어지면 더욱 좋다. 그때, 사장이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회사 관련 질문이라도 있으면, 오늘 목적은 백 퍼센트 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쉽게 따라붙지 못한다. 자기와 목적이 같은 다른 두 명이 더 있기 때문이다.
필드에서도 그렇지만, 그늘막 집에서 간단한 음료수를 마시는 공간에서도 사장 바로 옆이나 정면은 명당자리이다.
그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보이지 않는 암투가 구중궁궐 임금을 둘러싼 후궁 간 암투 못지않게 치열하다.
두 번째 주안점은 스코어다.
참으로 비효율적이고 알다가도 모를 운동이 골프다.
사장은 80대 초반 정도를 친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타이거 우즈와 무슨 교감을 나누었는지 70대 초반을 친 적도 있는
반면, 어떤 때에는 멘털이 무너져 90대 초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사장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상관이 없지만, 나쁜 날에는 자신도 나쁜 척하며 같이 스코어가 무너져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눈치도 없이 그런 날에 홀인원hole-in-one이라도 하는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야 아무 일도 없겠지만, 각자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자기 자신을 책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장 컨디션이 안 좋은 날, 운동 중에 “박 상무, 오늘 샷이 아주 좋아!”라고 말하면, 그것이 좋은 뜻인지 아닌지 잘 판단해야 한다.
아니, 그런 상황까지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
어차피, 한국 사회에서 골프는 ‘사교’이지 ‘운동’이 아니지 않은가?
어쨌거나, 사장과 한 팀이 되었다는 것은 회사에서 신임 받는다는 또 다른 증거다.
오늘 참석한 다른 팀 네 명(고참 임원 4명)이 부장에서 연초에 갓 임원이 된 박 상무를 얼마나 부러워할 것인가!
새로 부임한 B사장은 골프광이다.
그는 정치인 출신이다.
원래 이 회사 사장은 퇴직 공무원 자리라고 인식되어 왔다.
무슨 특별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건 아니지만, 한 번 차지한 자리는 절대 돌려주는 법이 없는 나라님들의 특성에 따라 관행처럼 자기들끼리 자리를 주고받아 왔다.
그런데, 신임 B사장이 그런 관행이 어느 법전에 나와 있는 거냐며 빈틈을 비집고 들어 왔다.
전임 사장들은 공무원 특성상 기존 질서를 중시하고 파격을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정치인으로 성장한 B사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좋게 말하면, 돌려 치지 않고 직선을 선호하며 시원시원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골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정치인이라 그런지 입담이 장난이 아니며 풍채 또한 좋은 편이다.
지난번 총선에서 상대당 후보에게 일격을 당하고 쉬던 중, 우연히 국회의원 당시 상임위원회 소속 산하 기관이었던 이 회사가 생각났다.
그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며, 상임위원회에서의 각별한 인연을 내세우며, 본인은 낙하산이 절대 아니라 전문가임을 강조하며, 밥그릇을 빼앗겨 저항하는 공무원과 노조 반대를 무릅쓰고 사장에 취임했다.
취임 첫 달, 본부별 사업보고를 마친 후, 잠시 쉬는 시간이다.
“박 상무, 박 상무는 운동 자주 하세요?”
“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하려고 노력합니다만, 아무래도 시간이 없다 보니... 잘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을? 대단합니다. 직장 다니면서 어떻게 두세 번을! 그 비결 한 번 가르쳐 주세요.”
B사장은 감탄하며 묻는다.
“주중에는 집 뒤에 있는 산에 오르고, 주말에는 가족이나 친구들하고 북한산도 가고 도봉산에도 가고 있습니다.”
전임 사장 시절 함께 등산을 다닌 인연으로 재미를 본 그는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대답한다.
“북한산? 도봉산?..... 내가 말한 건 운동인데....”
“네?......” 박 상무는 순간 헷갈려한다.
등산이 운동 아닌가?
그럼 뭐지, 저 양반은 등산이 취미? 스포츠? 레저인가? 얼굴이 벌게진다.
“아, 등산이야 얼라들이 하는 거고. 운동은 골프 말고 또 뭐가 있나?”
그는 탐탁지 않게 한 마디 한다.
“골프?.... 네.. 골프요. 골프는 백타 정도 치...고..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간다.
“뭐? 백타? 그럼 아직도 백돌이란 말입니까?”
그러더니, 사장이 갑자기 흥분하면서 사투리가 툭 튀어나온다.
“박 상무, 내, 니를 위해 한마디 해 줄끼다. 니 그러면 안된데이. 큰 일 난데이. 기획담당 상무란 자가 백돌이가 뭐꼬?”
사장은 마치 박 상무에게 커다란 하자가 있는 듯 말하며, 삼 개월 말미를 주겠다면서, 임원이라는 자가 그렇게 골프에 무관심해서야 말이 되냐며 지켜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이번 사장 코드는 ‘골프’다.
다음 날부터, 회사에 난데없이 골프 토네이도tornado가 불어 닥쳤다.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도가 셌다.
평소에 골프를 치던 임원급이나 부서장급에서는 더욱 세게 그립을 잡고 골프에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는 팀장급에 이어 차장급까지 그 광풍 대열에 동참한다.
회사는 골프가 사교문화, 영업에 필수적이라며 갑자기 자기 개발비를 노조에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선심을 쓰듯이 떡하니 백만 원에서 이백만 원으로 100% 인상을 해 주었다.
신임 B사장 덕분에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었다. 회사 주변에 골프 연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종 할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회사 직원들에게 접근했다. 티칭 코치 수준도 높아졌다.
처음에는 동네 코치 수준에서 점점 미국 무슨 무슨 골프클럽 경력에 PGA, LPGA 이력까지 등장하며 직원들을 유인했다. 방향과 속도를 정확히 측정하는 기계들이 경쟁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어디선가부터 야간 골프장 출입이 시작되었다. 직원들이 팀을 만들어 우르르 몰려다녔다.
이제는 휴게시간, 점심시간 또는 회의 도중 브레이크 타임에는 어김없이 골프 이야기가 화제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립grip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무런 이야깃거리가 없어져 버렸다.
심지어, 직원들 간에 서로 골프를 치는 폼address을 잡고, 허리를 돌리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유행이 되어 갔다.
회사 분위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골프 열풍 1단계가 지나갔다. 그리고 한 차원 높은 2단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친선 도모, 영업을 목적으로 즐기던 골프가 슬슬 맹숭맹숭하게 느껴질 즈음부터, 내기골프가 도입된 것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18홀 전체에서 지는 사람이 식사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시작되더니, 점차 세분화되어 매 홀마다 점수를 매겨 돈이 오고 가게 되었다.
종국에는 1타 당 얼마 수준까지 나감으로써 짜릿한 승부욕을 즐기는 직원들이 등장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만 되면, 누가 돈을 얼마 따고 잃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내기를 했는지가 핫한 뉴스거리였다.
임원들로부터 시작된 내기골프는 곧 팀장급 레벨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당신, 요새 갑자기 씀씀이가 왜 이렇게 많아졌어?”
박 상무 아내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응... 골프 때문에... ”
“골프? 그 비용은 용돈에 다 포함되어 있잖아!”
“그게.. 내기 골프에서 늘 지는 바람에..”
그는 풀이 죽어 말한다.
“아니, 한두 푼도 아니고 한 달에 백만 원 이상이나 내기를 한다고? 그런 내기를 왜 하는데? 자신 없으면 못 한다고 말해.”
그의 아내는 화가 나 한마다 한다.
“무슨 소리야. 사장하고 한 번 치면 내기로 50, 60만 원은 깨지지만, 그래도 사장하고 한 번 라운딩 하려고 줄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줄? 줄을 왜 서는데, 그 피 같은 돈을 잃어가며...”
“이 사람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아, 사장하고 그렇게 사적으로 스킨십하기가 쉬워?
사장도 그런 자리는 아무 하고나 안 해!
임원이라고 다 같은 임원인 줄 알아? 그래도 나 정도나 되니까....”
그는 자신 있게 말하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사장에게 내기 골프를 제안한 것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도 이렇게 판이 커질 줄은 모르고 단지, 사장에게 좀 더 자극적인 것을 권하다 보니 자기 돈도 잃고, 회사 분위기도 엉망이고....
하지만, 분명하게 얻은 것도 있다.
내기 골프 첫날, 박 상무 돈을 왕창 딴 사장은, 만약 돈을 돌려주면 결코 그의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서 냉정하게 돈을 챙겼다.
그리고 무심코 한 마디를 던졌는데, 그 말이 박 상무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월급쟁이의 숙명이었다.
“박 상무는 뭘 하나 해도 화끈 해. 난 그게 마음에 들더라.”
정상적인 회사라면, 이 정도 내기 광풍이면, 근무기강 확립 차원에서 인사부서나 감사부서에서 어떤 형태로든 브레이크를 걸을 만도 한데, 도통 말이 없다.
대신, 내기골프라는 트렌드에 소외되지 않기 위해 모두 불나방처럼 달려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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