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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장동 May 17. 2020

[단편] 대쪽 같은 박 전무 - 4

직장인 이야기

 
사장이 또다시 바뀌었다.

 시간이 쉼 없이 달려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골프로 천하를 호령하던 사장은 총선 출마를 위해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새로운 사장이 선임되었다. 이번에는 전과 좀 다른 유형의 사장이다.

 그토록 직원들을 운동으로 괴롭히던 전임 사장들과 달리, 이번 사장은 운동에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렇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던가? 등산이다! 골프다! 온 직원들을 열병에 시달리게 만든 것들이 사장이 바뀌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래부터, 즐겨하던 직원들은 여전히 즐기고,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번 사장은 어떨까? 운동에는 관심이 없다던데.’ 

 하지만, 몇 번 심하게 데인 경험이 있는지라 임직원들은 새로운 사장이 어떤 유형인지 성향 파악에 골몰했다. 

사장들은 대개 취임사에서 본인의 경영 방침과 방향을 제시해 왔다. 직원들은 취임사에 주목했다. 

 신임 C사장은 취임사 처음과 끝을 ‘글로벌’로 장식했다.  

 G. L. O. B. A. L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단어인가?  

 주니어, 시니어를 넘어 심지어 임원들까지도 젊은 시절 TOEIC, TOFLE 책을 펼치며 세계 속에서 일하는 자신을 꿈꾸어 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신임 C사장은 직원들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던 열정에 불을 지피며 새로운 경영 화두話頭로 글로벌을 제시했다. 

 회사가 오랜만에 활기차고 무언가 도전해 보자는 기운이 넘쳐났다. 

 사장은 취임한 지 약 두 달 후에, 전 직원을 대상으로 경영전략회의를 서울시내 번듯한 특급호텔에서 개최하였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턴트들이 나와 화려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제시하며 회사 내외를 둘러싼 경영환경을 분석한 후,

회사가 나아가야 할 길,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 - ‘글로벌 경영’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더니, 모든 조명이 일시에 꺼진다. 

 전 직원들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죽인다. 

 곧이어 흰색 바탕의 대형 플래카드 위에 ‘ㅇㅇ 업계의 글로벌 선두 기업’이라고 써진 붉은색 문구가 어둠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공중에서 아래로 서서히 내려온다. 

 사장은 이 화려한 퍼포먼스가 만족스러운 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동의를 표시했다. 

 모두 열광했다. 

 곧이어, 약간의 브레이크 타임을 거친 후, 각 본부별로 글로벌 경영 추진 계획을 발표하였다. 

 총 7개 본부와 준법감시 부서가 순서대로 강단에 선다. 

 신사업본부는 글로벌 기업과 제휴를 추진하고 가까운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에 진출하겠다고, 

 영업본부는 글로벌 회사의 영업방식을 도입하여 회사 매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재무본부에서는 선진국 회계기준을 도입하여 글로벌 기업과 치열한 경쟁에 대비하겠다고, 

 인사본부는 뉴욕, LA 등지에서 글로벌 인재를 직접 선발, 채용하여 회사 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IT본부는 글로벌 IT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준법감시인은 글로벌 기업 수준의 준법감시인 제도를 도입하겠다며 대미를 장식했다. 

 그 당시, 그 현장에서는 글로벌 기업에 준법감시인 제도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다만, 그 발표가 당시에는 통했지만 3년 후에 후임 사장으로부터 글로벌 회사에 실제로 준법감시인 제도가 있느냐는 물음에

 그 부서장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세히 파악해 보겠다고 답변한 점으로 미루어 그냥 일단 질러놓고 본 것이라고 추정될 뿐이었다.  

 한편, 그 이후 프로세스는 그야말로 일사천리. 

 회사 로고가 글로벌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동그랗던 회사 배지가 삼성그룹 로고와 비스무레한 모양처럼 마치 우주를 향해 질주할 듯 날렵하게, 색상 또한 강렬하고 도전적인 붉은색으로 변경되었다. 

 곳곳에 회사 새 비전 문구와 로고가 눈에 띄었다. 

 실제로, 글로벌 사업본부가 사장 직속으로 신설되고, 외부에서 글로벌 전문가라는 인사가 본부장으로 영업되었다. 서너 명의 외부 인력이 그를 따라 회사에 들어왔다.  

 사장 또한 분주히 움직였다. 

 그는 뉴욕, 파리, 런던까지 십여 일간 장기 출장을 수시로 다녀왔다. 그것도 대부분 수행원도 없는 단독 출장이다. 

 그는 출장 후 귀국 시에는 반드시 새벽 비행기로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6시경 회사 정문에 들어선다. 

 그리고 미리 도열해 있는 임원진과 간부급 직원들의 영접을 받는다. 

 곧이어, 새벽 간부회의가 개최된다. 

 사장은 회의 서두에서 ‘우리 모두는 우물 안 개구리’라며, 

 글로벌 기업들이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에 진출하여 우리 회사와 같이 보수적이고 경쟁력 없는 회사를 하루아침에 점령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그 생각으로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며, 멀쩡히 잠자고 나온 참석자들에게 죄책감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야간 비행으로 미처 면도도 하지 못해 까칠해진 수염, 강파른 몸매, 피곤을 한눈에 담은 안경이 그의 증언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은, 글로벌 경영을 향한 사장의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 회의 참석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사장은 이토록 자신의 몸도 사리지 않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글로벌 경영을 위해 뛰고 있는데, 그를 제외한 모든 간부들은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각 사업 본부에서는 사장 부재중에 쉬지 않고 일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쟁적으로 그동안의 추진업무를 보고했다. 

 사장은 한심스러운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를 참을성 있게 듣더니 모두 정신 차리려면 아직도 멀었다며 천장을 향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사장이 퇴장하자 부사장 주도하에 모두 사장님을 본받아 그분이 하시는 일에 십 분의 일이라도 하자는 결의를 마지막으로 회의는 종료되었다.  


 역시, 같은 시간대에 글로벌 사업 본부장은 동남아시아를 누비고 다녔다. 

 국내에 체류하는 시간보다 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을 정도로 현지 시장조사와 제휴처 발굴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전해졌다. 

 회사에서 최초로 진행하는 글로벌 사업이 가시화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연말 경영전략 회의장. 

 연초에는 특급호텔에서 전 직원이 참여하는 속에 개최되었던 회의가 수도권 인근에 소재한 회사 연수원에서 간부급만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각 본부별로 글로벌 사업 추진사항, 결과물에 대한 발표 자리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사업이란 원래 계량화, 수치화가 기본이다. 그러나 글로벌 사업과 관련된 모든 문서에는 그처럼 가장 기본적인 숫자가 일제히 빠져 있었다. 

 이에 대해 사장은 원래 글로벌 사업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면서, 

 긴 호흡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long-term business라는 점을 강조하더니, 

 너무 숫자에 연연할 필요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사장님 멘트 하나로 글로벌과 관련된 모든 부진 항목들은 일제히 면죄부를 부여받았다. 

 참석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별 발표에 이어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사장은 특별히 마이크를 잡고글로벌 사업의 발전을 위해 각자 좋은 의견을 가감 없이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침묵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그 침묵을 깨야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린 몇몇 부서장들이 영양가가 하나도 없는 맹탕 질의를 하면서 맥없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작년에 승진해 간부가 된 J팀장이 일어선다. 

 그는, “글로벌 사업을 위해 사장님께 건의드릴 사안이 몇 가지 있습니다.”라고 운을 뗀다. 

  “그래요? 네, 말씀해 보세요.” 

 알맹이 없는 토론에 지루해하던 사장이 흥미를 가지고 그를 쳐다보며 말한다. 

 “글로벌! 저는 글로벌 사업이 우리 회사에서 뿌리내리고 성공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지금부터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면서 그는, 

 글로벌 사업이 이벤트성 사업이 되지 않고 연속, 지속성을 이어가려면 회사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직원 각자에게 글로벌 사업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직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조직문화, 인사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구체적인 조치로서 우수 직원을 대상으로  해외 제휴처 기업과의 교차근무, 해외 어학연수 강화를 통해 젊은 직원들이 실질적으로 글로벌 사업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가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외부 전문가 위주의 글로벌 본부를 내부 직원도 대폭 참여시키면서 점차 내부 직원 비율이 높아져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장은 그의 발언에 대해 좋은 의견이라며 추켜세웠다.  



 “J팀장!” 

 상사인 박 상무가 휴식시간에 손을 흔들며 부른다.

  그가 다가간다. 

 “이 사람아, 왜 그런 질문을 해?”

 “네?...... 제가 뭘.... 잘못 했나요...?”

 “참.. 이제 팀장도 되었으면 돌아가는 판을 읽을 줄도 알아야지! 누구는 뭐 그런 문제점 몰라서 가만있는 줄 아나?”

 상무는 한심스런 눈초리다. 

 “저는 누군가는 이런 의견도 있다는 걸 말씀드렸을 뿐인데.....”

 “용기인지 만용蠻勇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이요? 아니, 사장님도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해 주셨는데요!”

 J팀장은 의아한 눈빛이다. 

 “칭찬? 칭찬이라....” 

 박 상무가 창밖을 쳐다보며 되 뇌일 무렵, 회의 재개를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그는 회의실로 들어가며, 

 “지금부터 글로벌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마, 절대로!”

 그는 못을 박 듯이 J팀장에게 말하고는 회의실로 성급히 들어간다.  

 그렇게 연말이 지나고 해가 바뀌자 인사이동 발표가 있었다. 

 작년에 승진하면서 마케팅본부에 온 J팀장은 수도권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박 상무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상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슬쩍 흘리듯이 아주 멀리 날아갈 것을 그나마 수도권 지점으로 막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J지점장은 지점장 모임에서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할 회사 뒷담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사장은 해외 출장을 반드시 부부동반으로 하며, 회사 규정에 따라 비용 일체는 회사 비용으로 처리한다는 것.

 실제로 해외 기업이나 제휴처를 방문을 했는지 여부는 사장과 비서만 안다는 것. 

 사장의 유일한 관심사는 돈이 되는 글로벌 시스템 구축 업체 선정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글로벌 본부장으로 채용된 임원은 해외 사업이나 글로벌 기업 경력이 전무하다는 점. 

 심지어, 영어조차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 

 최근 해외 업체와 접촉 중에 경험 부족으로 국제 사기단 사건에 말려들어 글로벌본부와 경영본부가 회사에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쉬쉬하며 수습 중에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한편, 본사 간부들은 입을 한번 잘못 놀린 죄로 J팀장이 가차 없이 지점으로 쫓겨난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회의시간에 아무런 질의나 토론 없이 오직 사장님 말씀을,

 마치 어느 나라 수령님 말씀을 수첩에 열심히 메모하는 당 간부들처럼,

 허리를 곧추 세우고 한 자 한 자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글로벌 사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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