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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장동 May 18. 2020

[단편] 대쪽 같은 박 전무 - 5

직장인 이야기


 신임 대표이사가 취임사를 읽고 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되던 글로벌 사업 전반을 재정비하겠다고 선언했다. 

 경험상 보면, 취임사 일성一聲이 글로벌 사업 재정비란 그 사업 폐지를 의미했다. 

 역시나, 

 회사 비전, 로고, 현수막에서 부터 달력, 수첩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호령하던 글로벌이란 단어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글로벌 사업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곧바로 회사가 망할 것처럼 분석한 그 수많은 컨설팅 결과물, 조직, 예산, 인력이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흔적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려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조직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된 사업이 아니었기에 누구에게도 미련이 남을 리 없었다. 

 한편, 전임 사장들은 이러니 저러니 말들은 많았지만 그래도 지위에 맞게 조직에 비전도 제시하고 크고 굵직굵직한 사업에 매달렸다. 

 하지만 새로운 사장은 이상한 방식으로 직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신임 D사장은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식을 대대적으로 혁신하겠다고 선언하더니, 첫 작품으로 사가社歌 변경을 들고 나왔다. 

 그는 그 일에 병적으로 집요하게 매달렸다. 

 회사가 발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사가를 지목하며  수동적이고 감상적이어서 시대변화를 이끌어 가지 못한다고 즉시 변경을 지시했다. 

 평소에 사가에 무심했던 직원들조차 ‘그게 사장이 첫 작품으로 추진할 사업인가’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모든 직원들은 결국 발라드도, 뽕짝도 아닌 기이한 신新사가를 외워서 불러야만 했다. 



 D사장의 본격적인 다음 작품은 6 시그마(six Sigma) 도입이었다.

 6 시그마란 원래 품질과 업무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고객만족을 극대화 하자는 품질 경영 혁신 기법의 일종이다.

 이 회사에 적용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원래 회사라는 조직은 사장이 하고 싶으면 해야 할 이유는 100가지가 넘고, 사장이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이유 또한 100가지가 넘는 법이다.

 순서에 따라, 6 시그마 추진을 위한 경영전략회의가 개최되었다.

 방법과 절차는 3년 전 글로벌 추진을 위한 전략회의와 판박이였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이제는 금기어禁忌語가 되어버린 글로벌이란 단어 대신 6 시그마가 그 자리를 냉큼 차지했다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사장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해병대 극기 훈련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극기 훈련을 탄생시킨 1등 공신은 비만을 항상 달고 다니는 박 상무였다.

 언 듯 보기에 전혀 매칭이 안 되는 이 한 건으로 박 상무는 사장의 신임을 얻어 전무이사로 승진하게 된다.

 사장은 본인이 해병대 출신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수차례 강조했다.

 대부분 임원들이 무심히 흘려들었던 그분의 군대 이력은, 박 상무의 능수능란한 작업을 거쳐 역시 같은 해병대 출신 연수팀장과 결합되더니,

 ‘해병대 극기 훈련’이라는 직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탄생되었다.

 젊은 직원들이 팀을 이루어 바닷가에서 노를 젓는 장면,

 바닷가 바위 위에서 한 손에는 검은 보트를 쥐고 다른 손을 위로 치켜올리며 회사 이름을 연호하는 장면,

 모든 임원들이 잠수복을 입은 채 물 밖으로 나와 구호를 외치는 장면,


 이 감동적인 사진들이 인쇄되어 사장이 쉽게 볼 수 있는 동선動線에 따라 임원실, 대회의실, 1층 로비 곳곳에 비치되었다.

 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만들어가는 대대적인 변화에 만족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 만족은 오랜 기간 ‘기회란 준비된 자의 것’이라며 한 방을 제대로 터뜨린 박 상무, 아니 이제 박 전무의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점심시간은 12시부터다. 11시 50분, 사장은 수화기를 든다.

 “박 전무, 오늘 점심이나 함께 할까?”

 점심 선약이 있어 나가기 직전에 전화를 받은 그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네, 사장님. 그렇지 않아도 지금 대기 중에 있습니다.”

  라며 그 즉시,

 “최 상무, 미안. 사장님 점심 전화가 왔네. 다음에 근사하게 살게. 나머지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줘. 부탁해”

 하면서 황급히 뛰어 내려가 1층에서 사장을 기다린다.  

 그는 또한, 아무도 맞추지 못하는 사장의 식사 습관에 제일 먼저 적응했다.  

 보통 사장과 식사를 할 경우에는 참석자 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후식까지 마신 다음 사무실로 돌아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D사장은 급한 성격에 맞게 식사를 아주 빠른 속도로 맹렬하게 끝낸다.

 처음에는 참석 직원들이 보조를 못 맞춰, 사장이 이미 식사를 끝내고 멍하니 직원들을 바라보면, 직원들은 허겁지겁 남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이다.

 박 전무도 처음에는 사장 속도를 맞추느라 뜨거운 칼국수를 먹다가 입천장이 데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인가부터 점심 식사를 할 때 사장보다도 더 빨리 그 뜨거운 칼국수에 국물까지 다 마시는 기염을 토하며 사장과 코드를 맞추어 나갔다. 



 흔히, 공기업을 두고 신神도 부러워하는 직장, 신이 숨겨 논 직장, 신만이 아는 직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장 좋은 직장은 ‘신神도 모르는 직장’이다.


 이 회사가 바로 그런 회사다.

 처음에 D사장이 회사에 부임했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내 평생 몸 바쳐 공직에 헌신한 대가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인가?

 심한 배신감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회사에 들어와 몇 달을 지내다 보니 하나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이런 알짜배기가 따로 없다.  

 첫째는 무슨 놈의 회사가 ‘갑’은 없고 ‘을’만 지천에 널려 있다.  

 오직 ‘갑’이라고는 국민인데 그런 추상적인 ‘갑’은 사실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共同책임은 無책임’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장이 어디 가서 영업할 필요도 없고, 국회의원이나 공무원 후배들에게 굽실거려야 할 이유도 전혀 없다.

 반면, 뒤를 돌아보면 ‘을’ 천지다. 발에 걸리는 건 모두 ‘을’ 뿐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공정거래법이 어쩌구저쩌구해도, 갑은 갑이고 을은 을이다.

 몰라서 그렇지, 을에게 갑이란 어떤 때에는 하나님보다도 더 무서울 때가 있다.  


 둘째는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  

 흔히, 공공성을 띠면 언론에 밥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공기관 성격상, 언론에 노출되면 대부분 기자들에게 씹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언론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이 회사 존재는 언론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본인만 사회적으로 시끄러운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면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고 대접은 대접대로 받고 마누라 계좌에 월급과 상여금은 차곡차곡 쌓인다.

 또한, 회사에 노동조합이 있기는 하나 직원들 성향이 원래 순한 양들이라 그런 지, 본인들 또한 험한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은 탓인 지, 도무지 존재감이 없다.

 가끔 식사라도 하면서 노조 간부들에게 적당한 수준의 인사 혜택을 주면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셋째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사실, D사장이 회사에 오기 전에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대형 국책은행 상임감사 자리와 이 회사 사장 자리였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선배라는 자가 그새 상임 감사 자리를 꿰차고 나갔다.

 처음에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만족한다.

 상임감사는 감사 일 뿐이다. 힘은 더 셀지 모르지만, 제약이 많다.

 이곳은 사장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렇듯, 좋은 회사에서 아쉬운 점은 딱 하나.

 연임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좋은 직장을 남겨두고 떠나면 눈이나 편히 감을 수 있을지!  

‘참, 세상이란 영원한 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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