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 戀敵) - 김영현
책장에서 ‘짜라투스트라의 사랑’을 집어 들었습니다.
1996년에 발행된, 무려 28년이 지난 아주 오래된 소설이고 지금은 절판된 상태라 접하기조차 쉽지 않은 책이죠. 그동안은 책과 서로 가끔 마주치면 눈인사가 고작이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손을 맞아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오더군요. 세월과 먼지의 더께가 잔뜩 낀 책 표지를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고 가득이나 얇아진 감정의 망막이 순식간에 무너짐을 느꼈어요.
책이 처음 나온 즈음, 입사 4년차였던 저는 대학생 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회사에서 밥만 축내던 신입사원을 넘어 그래도 밥값을 해보려고 어찌어찌 발버둥 치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이미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라는 단편으로 김영현 작가에 깊은 인상을 갖고 있던 터라 책이 나오자마자 교보문고로 달려가 초판을 들고 흐뭇해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어둠을 응시하듯 네 자신을 응시하라”
표지를 넘어선 첫 페이지부터 인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스스로를 짜라투스트라라고 칭했던 한 노교수의 사랑과 배신, 연적(戀敵)에 대한 깊은 애증, 그로 인한 파멸. 작품을 가로지르는 밑바탕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철학적 명제가 넓고 깊게 깔려 있습니다. 그 과정에 성경, T.S엘리엇, 백석, 괴테, 니체, 그리스 신화, 엘뤼아르, 소크라테스와 그밖에 철학적 명제들이 쉴 새 없이 불려나옵니다. 다소 무겁게 느껴질 만 한 주제인데도 독자에게 쉽게 다가오는 매력에 푹 빠져들어 그날 밤 단숨에 다 읽고도, 남겨진 긴 여운이 며칠을 갔던 기억도 새록새록 합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작가는 시와 소설을 엮어 이렇게 서사를 만들어 갑니다.
주인공 나는 청계천 헌 책방에서 우연히 한 노교수의 소설을 만난다. 책 줄거리는 늙은 철학자에게 아름답고 젊은 아내가 있다. 그런데 아내가 다른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고 이를 알게 된 철학자는 젊은 남자를 찾아가 제발 아내를 양보해 달라고 애원한다. 거절당한 철학자는 분노와 수치심에 가득 차 가슴에 칼을 품고 남자를 죽일 작정을 한다. 하지만 어느 날 두 사람이 다정히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젊은 남자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그저 그런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주인공 나는 같은 책방에서 같은 철학자가 쓴 시집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잠깐 들척여 보았더니 소설의 연장선상이 그 안에 그려져 있었다. 문득 소설 속의 늙은 철학자가 떠올라 연민과 호기심을 느끼며 시집에 몰두하게 되었다.
젊은이가 살던 아파트 인근 공원. 아내와 남자는 부둥켜안고 철학자는 그 모습을 그저 먼발치에서 분노의 눈길로 쳐다본다. 가슴에는 날이 잔뜩 선 칼이 철학자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젊음과 자신의 늙음을 비교하고는 비통한 심정으로 공원을 빠져 나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어둠만이 커다란 날개로 내 몸뚱이를 감싸네.
그 많던 지식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 많던 지혜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샤론의 수선화와도 같고 골짜기의 백합과도 같던 그 젊음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축축해진 마음을 안고 길모퉁이 작은 선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홀짝인다. 알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가슴 안쪽에 독약처럼 퍼진다.스스로에게 분노가 끓어오른다.
나는 비록 늙었으나
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나는 비록 초라하나
나의 열정은 들불보다 더 뜨거우니
집으로 돌아와 죽음보다 무서운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은 문자 그대로 뼛속을 파고드는 감정이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한때는 진리를 찾아 동서고금의 현인들을 공부했고, 스스로를 초인 ‘짜라투스트라’라고 부르던 시절, 하숙집 딸을 강간/임신을 시키고는 외면, 결국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고, 그 이후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 방황하던 시절이 그에게 있었다.
모진 시간을 견디자 다른 인연이 철학자에게 다가왔다.
그곳에 눈부신 한 송이 불꽃
여름 아침의 흰 장미처럼
골짜기의 백합처럼 그녀가 있었다.
나는 걸어갔다.
그 불꽃 속으로 수많은 추억과 눈물과 욕망을 안고·····
그리고 운명처럼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둘이 결합되었다.
내 어린 연인의 이름은, 비밀이에요.
당신이 질투할까봐, 비밀이에요.
그저 알파라거나 배타라거나 하고 불러주세요.
작은 새도 좋구, 작은 불꽃도 좋아요.
당신이 부르고 싶은 가장 좋은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아름답고 황홀했던 시절,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법, 영영 깨지 않을 것 같은 꿈도 아침이 되면 유령처럼 스러지는 법, 마침내 그녀는 한 마리 새처럼 날아갔다. 분노가 또다시 연적에 대한 질투로 이어진다.
질투가 나를 죽이는구나.
질투가 나의 목을 죄어 숨통을 막는구나.
흰머리칼을 파도처럼 세우고
그들을 바라보게 하는구나.
사내는 인생이 이렇게 피고 짐에, 한없는 덧없음에 탄식한다. 그리고 마지막을 향해 질주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대의 열정이 쫓던 것들 모두 어린 시절 무지개와 같구나.
죽음은 언제나 혼자 찾아오지.
죽음보다 더 외로운 게 있을까?
그 텅 비고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으로 어느 날 문득 혼자 가게 되지.
죽음이란 참 이상하지.
내 심장이 멈추면
아아, 내 이 빛나는 영혼은 어디로 가지?
참 알 수 없지 않은가!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려하니 세상 모든 게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진다. 자신을 배신하고 젊은이를 찾아간 아내마저 용서된다.
불을 훔치듯
내겐 그대의 한때를 훔쳤으니
이만하면 족하지.
내가 무엇이관데
이런 사랑을 가질 수 있었으랴!
다음 날 아침, 죽은 그의 등짝 위로 햇살 한 줄기가 창틈으로 새어 들어와 비춰주고 있었다. 그의 장례식은 조촐하고 엄숙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그의 젊은 부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주말에 이 책의 주인공처럼 헌 책방을 찾아나서 보심이 어떨까요?
혹시라도 ‘짜라투스트라의 사랑’을 마주하게 된다면 근래에 보기 드문 감동과 울림을 마주하게 되실 거라 감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