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자
좋은 환경을 찾아 다른 나라로 이민을 와서 그 꿈을 이루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다. 물론 안다.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쯤은. 그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 중에서 그래도 딱 하나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부모님을 자주 못 보는 것이다.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속상해하면 아내는 늘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살 때도 우리 부모님 고향에 일 년에 고작 명절 때 2번밖에 안 갔었어."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것도 사실이었다. 같은 나라에 함께 살 때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이런저런 일들로 부모님을 그렇게 자주 찾아뵙거나 그러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물리적으로 더 멀어져서 살다 보니 이제는 맘먹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 돼버려서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시는지 아버지는 늘 내편에서 나를 위로해 주셨다. 괜찮다고 그저 우리 가족이 여기서 행복하고 잘 살면 그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늘 그렇게 말해 주셨다. 이민 초기에 아내와 나는 솔직히 가족이 그리워서 약간의 향수병이 걸린 적도 있었다.
내가 이민을 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챙기는 몫이 남동생에게 건너가게 되었다. 사실 동생한테는 너무 미안해서 이민 준비를 하는 내내 아무것도 말을 안 했다. 떠나오는 마지막에 그렇게 됐다고 말을 했을 뿐이었다. 동생이 실망할까 봐 몇 년 살다가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도 말을 했었다. 안 그러면 동생이 나를 무척이나 미워할 것 같았다.
동생은 착하다. 그렇게 내가 호주로 이민을 간 이후로 항상 부모님을 챙겼다. 내 동생은 그렇다 치고 동생의 아내한테는 정말 면목이 서지 않았다. 처음에는 직접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늘 동생을 통해서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만 했다.
시간은 금방 지났고 이민을 시작한 지 15년이 됐다. 이렇게 여기에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사이 아이들도 다 자라서 둘 다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는 아내와 나도 여기가 더 편하다. 누가 그랬던가 공항에 내려서 마음이 편한 그 도시가 자기의 고향이라고. 몇 년 전부터 시드니 공항에 비행기가 내리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여기가 이제 우리의 고향이 돼버린 것이다.
시간이 그렇게 갈수록 나의 마음 한구석을 늘 짓누르고 있는 것이 있다.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불효가 아마도 손주들을 자주 못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호주로 왔으니 우리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학교 다니는 그 시간 내내 귀여운 손주들을 한번 제대로 안아 주지도 만져 보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몇 년마다 한국 방문을 하게 되면 그제야 보게 되셨다.
이민을 오면 그 순간부터 자식들은 불효자가 된다. 어쩔 수 없다. 그 죄책감과 그 무게감을 얼마나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때로는 행복할 수 있지만 때로는 무척 우울해지고 더 심하게 되면 자신감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삶에 대한 동기부여가 없어지게 된다. 내가 이렇게 희생하면서 이민을 왔었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게 된다.
15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동생과도 서먹서먹한 관계가 돼버렸다. 단지 자주 못 만나고 자주 연락 못하는 것으로만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동생은 나로 인해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해야 했을 몫을 형제라는 이유로 감당해 낸 것이다. 동생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동생도 어느덧 지쳤고 자신의 가족들을 돌봐야 했었고 동생 아내의 가족들까지도 챙겼어야 했으니 말은 안 했어도 그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작년에 아버지 팔순으로 인해 한국 방문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천 공항에서 동생과 긴 통화를 했다. 동생은 그동안 서운함과 힘들었던 것들을 전화기를 통해 쏟아내었고 나는 그것들을 다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다 이해가 되었고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다시 시드니로 돌아와서 한동안 생각이 참 많았다. 삶에 동력이 빠졌다. 아내가 눈치채고 뭔 일이냐고 물었다. 대충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효도를 좀 더 못할 뿐이지 그렇다고 불효자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당당해지라고 말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효도에 대해서 그리고 동생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무엇이 가장 나에게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했다. 결국엔 나 자신이 중요했다. 부모님의 효도도 중요하고 동생과의 관계도 필요하지만 그전에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결론을 찾았다. 내가 잘 살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하자고 했으며 그리고 그 모습을 더 자주 부모님을 통해서 보여주자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부모님에게 영상 통화를 하면 항상 나의 모습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무조건 불러서 같이 이야기했다. 사실은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영상 통화하는 것을 그리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 정도면 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용돈 많이 드리고 자주 만나서 맛있는 음식 사 드리고 이쁜 옷이나 가방 사주는 것도 훌륭한 효도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저 이렇게 일상을 보여주고 자주 연락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이렇게 맘먹고 나니까 처져있었던 몸과 마음이 올라오고 기운이 생겼다.
동생과의 관계도 다시 정의를 했다. 물론 동생한테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있지만 동생이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 아닐까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나중에 부모님이 물려주실 유산이 있으면 동생한테 좀 더 주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으로 나를 자책하고 나 스스로 짓누르고 해서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해서 후회가 밀려왔다. 아내의 말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살기로 했다. 우리 조금은 불효를 하고는 있지만 인생에서 있어서는 이것보다 더 값지고 더 중요한 일들이 많으니 그런 것들로 그 부족함을 채우기로 했다.
역시 아내는 나보다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