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은퇴하면 뭐 하지?

은퇴는 내가 좋아하는 일의 시작

by BM

요즘 세상에 과연 은퇴라는 것이 진짜 있나 라는 의심이 든다.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빡빡해서 정말 더 이상 내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모를까 무한대로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예전에 아내와 나는 차를 마시면서 아이들이 둘 다 대학교에 가면 자유가 찾아오고 우리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시간들이 올 거라는 낭만적인 대화를 종종 하곤 했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지금처럼 매일매일 출근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은퇴 후에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아내는 호주 와서 한창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매일 아침마다 도시락을 5개(큰아이 2개, 작은 아이 2개 그리고 나를 위해 하나)를 준비한 적도 있었다. 말이 5개지 정말 그 과정은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그런 걸 아내는 10년을 넘게 했어야 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늘 은퇴 후의 여유로운 삶을 동경해 왔으며 그런 것이 이 먼 이국땅 호주로 이민을 오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호주 이민을 준비할 당시에 인터넷 검색을 했을 때 대부분의 호주 사람들은 일찍 은퇴를 하고 국가의 복지 제도에 의존해서 살면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낸다는 그런 기사들이 참 많이 보았었다. 그래서 우리도 당시 정말 이런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며 역시 복지 국가는 이래서 복지 국가이구나 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다.


아마도 20년 전 2000년도 초반에 호주는 분명히 그랬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를 안 살아봐서.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2024년에 호주는 20년 전의 그때와 상황이 너무 바뀌었다. 그동안 이민자가 밀물처럼 들어왔고 그로 인해 호주의 복지 기금도 점점 더 줄어들어서 더 이상 아무 사람에게나 베풀어 주었던 혜택들이 점점 줄어 들어가고 호주의 연금 제도도 점점 더 빡빡해진 지 오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무런 준비 없이 그저 나이 들어서 은퇴하면 정부가 알아서 고령 복지 지원금을 살만큼 주겠지라고 예상했다가는 큰일 난다. 이제 더이사 그런 것들에만 의존해서 생활하기는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호주 사람들도 점점 일찍 은퇴하는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오히려 가능하면 좀 더 오래 회사를 더 다녀서 나중에 정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해서 더 많은 연금 저축을 하려고 안감힘을 다한다.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를 보더라도 나보다 나이가 꽤나 많은 고령의 개발자나 엔지니어들이 제법 많다. 겉모습만 보면 머리가 벌써 희끗희끗해서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분들이 꽤나 많다. 가끔씩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농담으로 너 이제 은퇴해야 하지 않아? 언제 할 거야?라고 물어보면 내가 왜 은퇴를 해? 일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지 무슨 소리야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자녀들이 독립해서 벌써 손주 손녀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며 이들은 나중의 은퇴를 위해 아직도 저축을 꽤 많이 하는 편이다.


예전에 팀회식에서 잡담의 주제가 은퇴였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진짜 은퇴하면 뭐 할 거야?라고 서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우리 팀은 호주 백인들이 많아서 속으로 궁금했기에 귀를 쫑긋하고 들었었다. 맘속으로 아마도 해외여행을 다닌다거나 아니면 골프장 회원으로 가입해서 매일 골프를 친다거나 아니면 조그마한 보트를 사고 좋아하는 낚시를 하루종일 한다던가 하는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내가 들은 대답들은 대충 이랬다:


- 부동산 중개인 자격증 공부를 해서 주중에는 쉬고 대신 주말에는 부동산 중개업일을 할 거야.

- 플러머 기술을 배워서 소소한 개인 사업을 할 거야.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야.

- 교사 보조 자격증 공부를 해서 파트타임으로 초등학교에 가서 보조 교사로 일을 할 거야.

- 나무 조경 기술을 배워서 가든 샾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할 거야.


속으로 아니 다들 은퇴를 해도 계속 뭔가를 하겠다는 거잖아. 아니 이게 은퇴 맞아?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이후로 나는 은퇴가 과연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은퇴를 마치 매일매일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이제는 더 이상 경제 활동을 멈추는 그런 것으로 쉽게 이해한다. 나도 다를 바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30년 넘게 일하시다가 만 60세에 은퇴하셨다. 당신은 정말 은퇴 후에 아무런 경제활동을 안 하셨다. 매달 나오는 공무원 연금으로 생활하는데 별 무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은퇴 당시 나는 아버지가 너무나 젊고 아직도 충분히 일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쭤 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바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은퇴하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냥 조그맣게 가지고 있는 텃밭들 가꾸면서 그렇게 살 거야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정말로 은퇴 후에 그렇게 사셨고 지금도 그러고 계신다. 그래서 나는 늘 은퇴는 아버지처럼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고 더 이상 나의 아버지가 살던 그런 시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아버지처럼 은퇴하고 경제활동은 안 하시고 연금에 의존하면서 사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부럽기만 하다.


50살이 넘어가고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나의 손길이 많이 필요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은퇴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곤 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런 주위의 환경 변화를 계기로 은퇴를 고민했다기보다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이제는 기획자로서 일하는 게 점점 버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기획자는 늘 새로운 트렌드를 공부해야 하고 창조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야 하고 그런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에너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젊은 나이에는 기본적으로 깔린 에너지가 있어서 쉽게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더 이상 아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노련함으로 버티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련함도 언제 가는 바닥을 보일 때가 있을 것이고 요즘 들어 점점 그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러던 찰나에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었다. 아내는 늘 내가 언제 가는 지금과 같은 텐션으로 풀타임으로 일하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했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기운이 조금이라도 더 있을 때에 뭔가를 배우고 준비하는 것을 계속 권했다. 더군다나 아내가 일하고 있는 현재 직장에 원래의 본업에서 은퇴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시는 노령의 근로자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그들의 대부분이 본업을 하는 중간에 미리 자격증을 따고 경험을 쌓아서 은퇴 후에 그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단다.


50세 중반. 인생의 반을 돌아가는 이 시점에 만약 내일 당장 내가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만약에 은퇴를 하게 되면 과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 대답을 못하겠다.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야기다. 나의 인생 후반전을 위해 곧 시작될 그 시간을 위해서 지금 당장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문득 은퇴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물러나 숨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은퇴의 정의는 이제 변했다고 본다. 더 이상 물러나 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은퇴 전에 했던 일들이 내가 좋았던 싫었던지 간에 무조건 했어야만 하던 일이나 직업이었다고 하면 은퇴 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즐길 수 있을 해야만 한다. 돌이켜 보면 앞서 팀 회식에서 팀원들이 말한 은퇴 후의 일들이 다 그런 일들이었다. 그들이 평소에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들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 은퇴가 뭔지를 진작에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라도 은퇴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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