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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 Aug 12. 2024

빨간펜 선생님을 만나다

프로덕트 매니저는 글을 많이 쓰는 직업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획 문서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좋은 기획 문서들을 읽어보면 전문 작가가 쓴 글보다 더 잘 썼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그런 프로덕트 매니저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기획 문서는 회사 내에서 여러 팀의 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고 참조한다. 나의 경우 내가 만드는 제품 기획에 대한 문서들은 우리 회사 내의 마케팅팀, 법무팀, 영업팀, 개발팀, 프로젝트 관리자, 그리고 경영지원 부서 등등 엄청나다. 


이렇게 많은 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문서를 읽기 때문에 글의 내용이 모두의 눈높이에 맞춰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로 아주 간결하게 쓰이지 않으면 엄청난 질문들이 쏟아지게 됨으로 인해 그것들을 응대하느라 꽤 많은 노력이 든다. 완벽한 글이 없듯이 제품 기획서도 잘 쓴 것들은 있지만 완벽한 것들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문서의 단어 하나하나는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하며 문장 하나하나에도 심여를 기울어야 한다. 적당히 쓰고 읽는 사람들이 잘 알아서 이해를 하겠지라고 쓴다면 100% 실패라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 마지막 직장이 외국게 컨설팅 회사였다. 컨설팅 회사로 옮기고 나서 달라진 점 중에 하나는 문서를 많이 쓰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 컨설팅 중간 또는 결과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파워포인트 문서가 대부분 들이었고 그마저도 발표자료는 그림이나 도형 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핵심을 설명하는 글은 아주 적은 분량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획의 의도나 전략 등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이해가 필요할 경우 담당자에게 설명을 따로 들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문화로 인해 한국의 회사에 그렇게 많은 보고를 위한 미팅이나 발표를 위한 미팅이 그렇게 많은지도 모르겠다.  


호주에 와서 첫 직장으로 들어간 작은 회사에서 나의 주요 업무는 당시 프로덕트 매니저가 생각하는 신규 제품이나 서비스의 기획 의도와 향후 발전 로드맵 등등에 대한 내용을 문서화해서 그것들을 개발팀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프로덕트 매니저와 회의가 끝나고 나서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파워포인트를 이용해서 화려한 그림과 간단한 요약으로 문서를 만들고 자신 있게 그것을 프로덕트 매니저에게 보냈던 적이 기억난다. 당연히 하루 이틀 정도 후에야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그 사이에 다른 업무를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메일을 보낸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답변이 바로 왔다. 이메일 내용에는 문서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고 시간 되면 자신의 책상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문서에 대해서 별로 줄 피드백이 없나 보다 생각하고 웃으면서 그의 자리에 가서 인사를 했다.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아무도 없는 키친으로 (호주에는 사무실에 모든 직원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키친이 있다. 한국으로 치면 탕비실과 비슷하다.) 나를 데리고 갔다. 나를 위해 커피를 한 잔 만들어 주면서 말을 시작했다. 그의 피드백은 직선적이고 간단했다. 기획서를 파워 포인트가 아니 워드로 다시 작성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내용은 누구나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그리고 가능한 아주 상세하게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내 어깨를 두들기고 자기 자리고 돌아가다가 갑자기 돌아서서는 "미안, 내가 미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걱정 마. 내가 도와줄 테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내 자리로 와서 일단 노트북에서 마이크로 소프트 워드를 띄웠다. 하얀 빈 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면서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번도 기획서를 워드를 이용해서 만든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보니 나에게는 구글이라는 도우미가 있었다. 얼른 구글 검색을 통해 워드로 된 제품 기획서 샘플을 다운로드하여서 읽어보았다. 그렇게 몇 개 정도의 예제 문서를 읽고 나니 대충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며 어떤 순서로 시작해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을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가했다. 결국엔 모든 내용은 우리 회사가 만들려는 제품과 그 배경 설명이 들어가야 했었다. 말하자면 구글은 겨우 10% 정도만 나에게 도움을 주었을 뿐 나머지 90%는 결국 나의 몫이었다.


겨우 드래프트를 만들어서 바로 프로덕트 매니저에게 리뷰를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이번에는 답장을 받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답장은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에도 없었다. 무려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의 리뷰 답장을 이메일로 받았다 그것도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 바로.


이메일에 첨부된 문서를 열고나서 한동안 나는 현타가 왔다. 한마디로 멘붕이 온 것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든 페이지에 그리고 모든 문단에서 빨간색 줄로 쭉쭉 긋고 고친 단어와 문장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도저히 내가 처음 쓴 단어 중에서 살아남은 것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아래 그림은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첨부해 본다. 이것보다 훨씬 더 빨간 줄이 많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마디로 프로덕트 매니저는 문서를 처음부터 다시 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그의 이메일 마지막에 아래의 몇 가지 포인트를 주면서 다시 수정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1. 최대한으로 문장/단어 숫자를 줄여라 - 중복 설명/단어/문장을 찾아 지워라.

2. 기획 문서에 사용되는 단어 선택에 신중해라 - 기획서는 에세이나 일기장이 아니다.

3. 마지막으로 문서 기본에 충실해라 - 문서 제목, 목차, 페이지 번호, 작성 날짜의 정확성은 기본이다.


빨간색으로 쭉쭉 그어진 문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우울했었는데 저 위의 3가지 피드백을 보는 순간 "나 일주일 안에 잘리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머리를 쓱 훑고 지나갔다. 


그가 수정해 준 모든 것들을 다 적용하고 다시 2차 제품 기획을 한 후에 다시 문서를 업데이트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프로덕트 매니저가 회의실을 나가면서 나를 보고 윙크를 했다. 무슨 뜻인지 말 안 해도 안다. "Good luck".


두 번째 문서 업데이트에는 보다 더 많은 신중을 기울이고 위의 3가지 피드백을 생각하면서 수정을 했고 마찬가지로 이메일을 보냈지만 나에게 다시 돌아온 것은 수많은 빨간색 밑줄과 체크 박스 등등으로 인해 산산조각 난 문서뿐이었다. 이번에도 프로덕트 메니져는 내가 수정했거나 새로 추가한 대부분을 빨간색으로 지우고 고쳤다. 원본은 의미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유치원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한글을 제대로 못쓰는 유치원생 말이다. 유치원생이 어떻게 회사에서 기획서를 제대로 쓸 수 있단 말인가? 프로덕트 매니저의 2차 피드백을 보면서 망연 자실했고 나의 자존감은 바닥정도가 아니라 지하 999층까지 내려간 기분이었으며 어쩌면 나 스스로 못 버티고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나는 그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고 계속 그 프로덕트 매니저와 일을 했었고 3년 뒤에 나는 그 회사를 떠나 다른 회사로 이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 이직을 하기 전까지도 그는 나의 문서에 빨간 줄을 찍찍 그으면서 수정을 해주었다. 정말 맨 처음 그가 했던 말 -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 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일관성 있게 3년 내내 내가 쓴 문서를 리뷰하면서 잘못된 단어 혹은 문법에 대해서 빨간 줄을 사용해 가면서 수정을 해 주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처음보다는 빨간 줄이 줄어들긴 했었지만 아쉽게도 이직하기 전에 빨간 줄이 없는 완벽한 문서를 끝내 만들지 못했다. 그것이 그에게 많이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호주에서의 그렇게 첫 3년의 시간은 내 커리어 전체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것은 유치원생 수준의 글쓰기 기술을 가지고 있던 어떤 아이를 혼자서도 제품 기획서를 쓸 수 있는 어른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나의 빨간펜 선생님이 되어 주신 그 프로덕트 매니저는 정말 내 커리어 인생의 가장 고마운 스승이 되었고 아직도 가끔씩 링크드인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직한 회사에서 6개월 만에 드디어 프로덕트 매니저가 되었고 제품 기획서를 나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시간이 왔었다. 물론 그때도 나 위의 시니어 프로덕트 매니저가 있기는 했지만 예전에 내가 만났던 그 분과는 달랐다. 


3년 동안의 긴 연습생 시절은 내가 문서를 시작하고 끝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었다. 그때 내가 그에게서 배운 영어로 기획서 쓰는 팁을 몇 가지 공유하고자 한다.


원포인트 : 프로덕트 매니저의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다.
1. 잘 쓰인 제품 기획서를 최대한 많이 읽는 것을 권한다 : 나의 스승인 그 프로덕트 매니저가 첫 번째로 조언을 해준 것이 남들이 잘 쓴 문서를 최대한 많이 읽고 좋은 단어나 좋은 문장은 따로 기억하거나 외우라고 했다. 나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은 이 방법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 프로덕트 매니저는 원래 이란 태생으로 자신도 어릴 적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좋은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고 본다.
2. 읽고 수정하고 또 읽고 수정하는 반복을 최대한 많이 연습하기를 권한다  : 자신이 쓴 글을 스스로 읽어보고 수정하는 일이 이상하게 참 어렵다. 그 프로덕트 매니저의 두 번째 조언은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또 읽어보면서 계속 수정하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중복된 문장이 사라지고 이상한 단어도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이 조언에서 사실은 좀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면 나는 문서를 쓰고 얼마나 나 스스로 리뷰를 하고 교정을 했는가. 
3. 평소에 원페이지 문서 만들기 연습을 많이 하기를 권한다: 내가 원하는 제품의 아이디어나 전략을 단 한 장의 문서에 압축해서 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연습을 자꾸 시도하고 연습하면 글쓰기가 한결 수월해진다는 것을 들었다. 내가 주니어 시절에는 원페이지 요약 문서를 쓸 기회가 없었지만 시니어가 되면서 가끔씩 임원 보고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경우 원페이지 요약은 필수다.  

  

가끔 대학교 졸업을 앞둔 첫째 딸의 학교 에세이를 읽어 볼 기회가 있다. 딸아이가 자신이 쓴 글이 어떤지 리뷰를 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글이 참 깔끔하다. 역시 내가 쓰는 글과는 뭔가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는 늘 첫째 딸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호주는 학생들에게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참 많이 시킨다. 에세이가 보편화되어 있고 인문 전공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과제가 거의 에세이로 시작해서 에세이로 끝난다. 이런 아이들은 회사에 들어가서도 나처럼 문서를 쓰는 것이 두렵지 않을 테이다. 나처럼 빨간펜 선생이 특별히 필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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