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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 Oct 21. 2024

슬럼프는 당신의 약점이 아니다

지난 13년간 호주에서 그리고 한 회사에서 플랫폼 기획을 하면서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의 크고 긴 슬럼프를 경험하곤 했었다.


슬럼프는 힘들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오기 때문에 대비한다 것 자체가 힘들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왔다는 것을 모르다가 어느 순간에 알게 되는데 그때는 대부분 이미 늦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더 힘들다.


예를 들면 이런 것과 비슷하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펄펄 날아다니던 잘 나가던 축구 선수가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폼이 떨어지고 좀처럼 빨리 예전 폼으로 돌아오지 못해서 전전 긍긍하는 경우를 우리는 가끔씩 본다. 인터뷰를 해보면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 하던 루틴대로 했음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예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슬럼프는 추운 겨울이나 환절기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감기처럼 걸리면 심한 앓이를 해야 만이 몸에 다시 면역력이 생겨서 재생이 되는 것처럼 그것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흔히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비유하지 않나. 슬럼프는 약간의 우울증, 번아웃 그리고 신체적인 변화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온다는 느낌이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관리를 해야 하듯이 슬럼프에 빠지지 않으려면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플랫폼 기획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기획해서 출시한 제품이나 서비스가 세일이 많이 되거나 사용자가 많아지거나 등등 그 성과에 따라서 평가를 많이 받곤 한다. 아무래도 기획을 했던 과정에서의 최고의 노력보다는 결과물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다른 이유로 나의 능력이 평가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번아웃도 오고 슬럼프도 온다.


나도 그런 경험들을 몇 번 하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훅하고 들어온 슬럼프는 나를 물에 젖은 스펀지같이 만들어 버려서 일단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일단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일에 집중을 하려고 해도 아무리 신선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려고 해도 그냥 하얀 빈 종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에서 일할 적에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당시에 이상하게도 내가 슬럼프에 빠졌다는 사실을 그 어떤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나를 대신해 줄 백업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써 주는 이들이 없었다. 나의 매니저들은 그저 "며칠 좀 쉬어. 그리고 다시 와서 일하면 나을 거야" 라던지 혹은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까?"라고 할 뿐이다. 그나마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제안을 했던 매니저들을 참 고마운 분들에 속했다. 정말 심한 사람들은 "다들 힘들어 그러니까 약한 모습이지 말자. 응?"이라고 등을 한 대 때리면서 나를 뒤돌아가게 했다.


당시는 참 어리기도 했었고 정말 일이 인생에서 다인 줄 알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반항을 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을 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을 갈고 또 갈아 가면서 일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호주에 이민 와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슬럼프가 가끔씩 왔다. 아무리 호주 사람들이 워라밸을 즐기고 삶 자체가 느슨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밖에서 볼 때다. 안에서 직접 일을 해보니 일을 하는 강도가 결코 낮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일을 한다. 근무 시간에는 정말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편이다.


아무튼 호주에서 처음으로 프러덕트 매니저가 되고 나서 신규 플랫폼을 기획하면서 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당시는 이민 초기라 가족들도 챙기랴 직장에서 자리도 잡아야 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참 힘든 시기였다. 앞선 연재에서도 말했듯이 기획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부탁하고 그리고 조화를 만들어서 리드를 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나 같이 처음 입사한 사람은 사람들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힘듬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많이 도움을 받아서 첫 프로젝트를 잘 마쳤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슬럼프가 왔다. 출시된 플랫폼도 잘되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격려도 받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인 모를 슬럼프가 왔다. 힘들었다. 아니 힘들어 보였나 보다. 나의 매니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픈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한 회사에서 약점으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매니저가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매니저가 내가 찾아와서 먼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말을 안 하고 버티고 지내는 것을 보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불렀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마지막에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

"슬럼프는 너의 약점이 아니야. 그건 내가 관리해야 할 일이지"

그 미팅에서 매니저가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휴가를 가는 것. 또 하나는 나를 좀 더 쉬운 프로젝트로 보내는 것.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도 되고 두 가지를 다 해도 된다고 그랬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말로 마무리를 했다.

"나는 너의 일을 백업해 줄 수 있지만 너의 가족이나 너의 건강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어. 그러니까 너의 가족에 문제가 생겼거나 너의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나에게 바로 얘기해 줘"

텍스트 북에서 읽었던 좋은 매니저의 모습을 보았다.


그 미팅 후에 나는 휴가를 선택했고 가족들과 한국으로 휴가를 갔다. 매니저가 인사부에 말을 해서 미래의 휴가까지 당겨서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래서 한 달 정도 휴가를 받아서 한국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 후로도 기획일을 하면서 가끔씩 슬럼프가 왔었다. 짧은 것들도 있어고 긴 터널들을 지나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인 것은 첫 번째 일이 있은 후에는 늘 슬럼프가 와서 느끼면 매니저와 상담을 하고 원하는 방향을 의논하곤 했다. 그럴때마나 한 번도 매니저가 반대를 하거나 나의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가 없었다.


나에게는 나만의 슬럼프 극복 방법이 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결론은  딱 2가지 밖에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슬럼프 극복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 두 가지가 처방전이다. 그래서 그걸 공유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일단 슬럼프가 찾아오면 가능한 한 빨리 모두 연차 휴가를 최대한 모아 모아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떠나야 하고 내가 일하는 직장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해야 한다. 하물면 지금 같이 일하는 동료들하고도 완전히 소통을 단절시켜야 한다.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까지 갈 용기는 없어서 이런 경우 항상 한국으로 여행을 갔다 오곤 했다.


나의 슬럼프는 아내도 느낀다. 아니 그녀가 더 빨리 아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 저녁을 먹다가 "여보, 한국 한번 갔다 오지 그래?"라고 먼저 말을 꺼낸다. 그 말은 내가 이미 슬럼프라는 것이다.


두 번째 해결방법은 지금까지 해 오던 제품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완전히 다른 제품으로 프로젝트를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지금 당장 휴가를 떠날 수 없을 경우는 이 방법도 괜찮은 선택이다. 즉시 매니저를 찾아가서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호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좋은 점 중에 하나가 매니저들은 거의 대부분 직원들의 고민들을 잘 들어주는 편이다. 지금까지 여러 매니저들을 만났는데 거의 비슷했다. 한국에서는 상사 눈치를 보면서 말을 끄집어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참 많이 했는데, 호주에서는 개인의 고민뿐만 아니라 회사 내의 일에 관련된 문제점이 있을 때마다 스스럼없이 모든 것들을 매니저와 상담이 가능하다. 특히 직원의 건강이나 가족 구성원중에서 문제가 생겨서 상담을 하게 되면 100% 직원의 의견을 서포트해 준다.


최근 일이다.

지난 1년을 한 팀과 또 달렸다.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서 힘들 줄 알면서도 손을 들고 참여했다. 한 팀으로 이렇게 재미있게 일한 적이 없었던 만큼 성과도 좋았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도 정이 많이 들었다. 어느 날 매니저가 호출을 해서 만났다. 갑자기 나를 다른 플랫폼 기획으로 보내고 싶다고 했다. 물론 내가 원한다면. 순간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매니저가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마지막 말이 나를 흔들었다. "너 힘들어 보여. 좀 바꾸는 것도 좋아서 미리 말하는 거니까 너무 오래 고민은 하지 말고...."라고 말이다.


나는 좋았고 성취감도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온 매니저는 나를 쭉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몇 번의 슬럼프를 본 그는 나를 이미 조금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까도 말했지만 슬럼프는 자신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지금 슬럼프에 들어갈 모드인지 아닌지 말이다. 어쩌면 나 외의 누군가가 그걸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다음날 나는 바로 매니저에게 신규 프로젝트로 옮기겠다고 전화를 했다. 나를 갈아 가면서 일하는 것은 조직에도 팀에도 무엇보다도 나에게 결코 더 이상 좋은 방식이 아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슬럼프가 오면 절대로 숨기지 마시길 권하고 싶다. 예전에 슬럼프는 나의 잘못이고 나의 연약함으로 생기는 나만의 병이라고 생각하고 약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나의 약점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시냇물이 바위를 만나면 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듯이 긴 인생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이고 누군가에 말하고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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