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플랫폼의 출시 시기인 3월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1월이 시작될 때 만 해도 아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준비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긴장을 늦춘 것이 화근이었다. 역시 모든 것은 계획대로 잘 안 되는 게 인생이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1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온 정신을 그쪽에 다 쏟아붓다 보니 그다음에 준비해야 할 모든 일들이 빡빡한 스케줄로 돌아가게 돼버렸다. 기차는 종착역으로 최대 속대로 달려가는데 왠지 종착역은 기차를 맞이할 준비가 안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프러덕트 매니저는 신규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되기 전에 회사 내부에 공지를 해야 한다. 워낙에 중요한 이벤트이다 보니 사전에 꼼꼼히 준비해야 할 일들이 워낙에 많다. 프러덕트 매니저의 책임이 상당히 많지만 당연히 한 사람이 다 할 수 없다. 하지만 프러덕트 매니저가 꼭 완성해야 할 문서가 있다. 그것은 제품 마케팅팀, 세일즈, 법무팀 등등 여러 팀들이 참조하는 문서다.
마케팅팀은 이 문서를 통해 신규 제품은 무엇이며, 어떤 시장과 유저들을 목표로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제품이 고객에게 줄 수 있는 밸류(가치)는 어떤 것이며, 주요 기능들은 또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Go-to-market 준비를 한다.
사내 법무팀은 제품이 국가에서 정한 법이나 규제사항들을 잘 지키는지 나중에 고객이나 소비자와 법적인 문제로 인해 소송에 휘말릴 만한 요지가 있는지 검토하다.
세일즈는 당연히 제품에 대한 가격 모델의 종류가 어떠한지 그에 따라 어떤 세이즈 채널이나 방식을 택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지원부서에서도 내가 만든 문서를 송부해야 한다. 신규 제품에 대한 고객의 컴플레인은 어떤 것들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런 일들이 발생할 때를 대비한 사전 준비작업을 하는데 제품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만든 문서를 보게 된다.
그리고 또 많은 사내 팀들이 이 문서를 보게 되는데 대충만 봐도 이 문서가 신규 제품 론칭에 있어서 어느 정도 중요한 것인지 아마도 이쯤에서 감을 잡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의 보스(매니저)는 늘 이 문서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그래서 나도 그 어떤 일보다도 이 문서 작업이 시작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호주에 와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국이랑 다른 점 중에 하나가 문서의 대부분이 워드 형식이다. 그림이 많이 들어가고 요점만 정리하는 파워포인트 형식의 문서는 정말 특별하게 발표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초기에 직장 생활을 할 때 워드 형식의 문서를 작성하는 것에 적응하느라고 참 애를 많이 먹었던 경험이 많았다. 그 이야기는 예전에 연재된 글에 더 자세히 나와 있으니 시간면 읽어보시길 바란다.
https://brunch.co.kr/@brianhyungzoomo/32
작년에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 두 권의 브런치 북을 쓰면서 참 글쓰기가 신났고 즐거웠다. 그러다가 연말쯤에 글 쓰는 것이 점점 힘들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고작 매주 1편의 글만 올리면서 무슨 이런 불평을 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1편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글쓰기 작업은 참 힘든 일이구나라는 것을 가졌고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더니 그러면 2주에 1편씩 올리는 것으로 조정을 해 보라고 권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그것이 더 낫지 않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좀 조절을 하고 나니 다시 글쓰기가 부담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글쓰기는 브런치에서만 어려운 숙제가 아니다. 회사에서도 글쓰기가 참 힘든 일이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부어서 글을 쓰고 검토도 두 번 세 번 한 후에 문서를 보스에게 보내도 다시 돌아오는 것은 온통 빨간 줄 투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받는 피드백이 적절한 단어의 선택이다. 이건 마치 그들(호주 현지인들)의 영어 사전은 우리(이방인 혹은 동양인)가 가지고 있는 사전이랑 다른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우리 사전에는 없는 그 무언가가 그들에게는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정말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정말 치사해서 못해 먹겠다는 투정을 부렸다가도 다시 그 수정된 문서를 감정을 조금 추스르고 읽어보면 참 깔끔하다 그리고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뭔가 노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한글로 글쓰기를 잘하려면 책을 많이 봐야 한다고 많이들 말한다. 그 공식을 영어로 대입시켜 보면 영어로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된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문제는 내가 이 간단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글로 된 책들은 그래도 일 년에 10권 정도는 읽는 편인데 영문으로 된 책들은 고작 2-3권 정도가 다다. 그러니 어떻게 좋은 단어가 내 머릿속에 많이 있을까.
어제까지 60 페이지 정도의 문서를 완성했다. 페이지 수만 보면 나 자신도 자랑스러울 정도로 참 많은 내용을 채웠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정말 제대로 된 것이냐 라는 게 문제다. 다음 주는 또 나의 빨간펜 선생님(나의 보스)에게 혼나는 주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쯤 되면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회사에서 잘리는 것 아니에요?라고 말이다. 한국에서였다면 아마도 99% 능력 없다고 잘렸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들을 잘하는 만능 슈퍼맨을 원하니까. 하지만 호주는 다르다. 회사에서 어떤 직원을 평가할 때 그 직원이 어떤 가치를 회사에 기여하는 지를 본다. 단 한 가지라도 가치를 준다고 하면 괜찮다. 그것이 다른 직원들이 가지지 못하는 차별한 된 뭔가라고 하면 더욱더 좋다. 이 부분은 다음에 따로 자세히 글로 올릴 예정이다.
시드니는 긴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 산책에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