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2005년 그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외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대기업 고객 회사와 큰 컨설팅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서 컨설팅 프로젝트였지 매일 야근은 기본이었다. 퇴근 시간이 늘 10시쯤이었다. 주말도 일이 많거나 프로젝트 데드라인을 맞춰야 할 일이 생기면 나가서 일하곤 했다. 남들이 다 가던 여름휴가는 늘 없었다.
둘째딸 아이가 2살 조금 지났을 나이였으며 첫째 녀석도 여전히 엄마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나이였다. 아내의 육아가 정점을 달하던 시기였다.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 10시에 들어와서 씻고 나면 피곤해서 그냥 자기 바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내 대신에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주거나 집안일을 도와주거나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분당에서 고객과 늦게까지 회의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운전해서 오는 길에 갑자기 숨이 막혔다. 순간적으로 창문을 내리고 긴 호흡을 한 두 번 한 후에야 비로소 나아졌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좀 무리했나 보다 생각하면서 까먹었다.
그런데 몇 주일 후에 똑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운전을 하고 오는데 정확하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저번처럼 창문을 내리고 호흡을 했지만 이번에는 소용이 없었다. 운전대를 쥐고 있는 손바닥, 얼굴 그리고 등짝에도 땀으로 젖었다. 그 순간 차를 새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대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러 시시콜콜한 것을 물어보면서 시간을 끌고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켰다. 그러자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뒤로도 몇번을 그렇게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갑자기 야근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이 너무 두려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늘 그런 일이 항상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갑자기 어느 날에 예고 없이 느닷없이 왔기 때문에 무서웠다. 특히 갑자기 차가 많아서 길이 막히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길 경우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아내에게 말하지 못했다. 이미 아내는 육아와 집안일로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던 그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나를 괴롭혔고 다행히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그런 일이 없어졌다. 그 후로 그 도로로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었다.
20년이 지난 후 지금 그때를 가끔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때 나는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라고 조심스럽게 의심한다. 당시에 "공황장애"라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다. 내가 알기로 "공황장애"도 어떤 연예인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극한의 스트레스, 중압감 그리고 피로감으로 인해 몸이 주는 신호라고 알고 있다.
그 프로젝트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정말 이렇게 살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내 삶이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것이 나를 호주로 이끌었다. 다들 나의 결정에 무모하다고 했으며 응원보다 걱정들이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살-고-싶-었-다.
호주로 이민 와서 새로운 인생 2막의 삶을 살면서 늘 행복했지만은 않았다. 여기서도 일에 대한 스트레스, 긴장감, 압박감 그리고 책임감 등등의 한국에서 가졌던 비슷한 종류의 부담스러운 것들이 여전히 존재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내 곁에 아내와 아이들의 가족들이 있었고 그들과 더 많은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시간들을 통해서 많은 압박감 그리고 긴장들이 치유되고 해소되거나 때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어찌 되었던 퇴근 후 저녁에는 늘 가족들과의 따뜻한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었고 아이들과의 더 많은 시간들은 보낼 수 있었다. 그 어떤 약이나 치유의 방법들보다도 더 효과가 좋았다. 가족들과의 시간들은 늘 나를 빠르게 회복시켜 주는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꽤나 깊고 긴 성장통을 겪었다. 남들은 다 하는 사춘기라고 했으며 시간이 조금만 지나가면 금방 사라질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위로를 했지만 그런 말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내에게서도 점점 힘들어하는 것이 보였다.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반대로 매일매일 조금씩 무너지고 상처받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러다가 정말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호주 이민이었기에 가족으로 인해 무너지고 좌절하고 상처받는 나의 모습이 도무지 용납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오히려 나는 더 엄한 잣대로 나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나 자신을 못난 아빠로 그리고 무능력한 남편으로 정의하고 자책하고 있던 나 자신을 볼 때 다시 20년 전에 한국에서 느꼈던 그 불안한 감정들이 스물스물 올라오려고 했다.
이미 20년 전에 한국을 떠나 오면서 다 정리하고 다 버리고 왔었다고 생각했던 그 나쁜 감정의 기억들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느꼈을 때에 비로소 내가 왜 호주라는 나라에 내 가족들을 데리고 왔나 라는 처음으로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계획 대로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고, 치열했지만 극복했다고 생각했고 책임감을 한 번도 놓지 않고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가족이 무너지면서 그 모든 것들이 다 부정되기 시작했다. 또다시 20년 그때처럼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시 살. 기. 위. 해. 서
도망쳐 온 곳이 바로 린필드였다.
멀리 달려서 도망쳐 왔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집에서 5킬로도 안 떨어진 동네였다.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았던 나를 린필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나를 받아 주었고 내 등짝을 토닥토닥 두들기면서 "괜찮다"라고 "이젠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
린필드로 도망쳐 온 지 이번 달이면 꼬박 3년째가 된다. 그 사이에 나의 삶은 많이 가벼워졌다. 매일 아침마다 눈뜨고 일어남에 감사하고, 일하러 나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저녁이면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편안히 잠들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처음 린필드로 도망쳐 왔을 때 마음처럼 다시 살기로 했고 그렇게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브런치 작가가 된 것도 3년째이다. 그러니까 내가 린필드로 왔었을 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글을 쓰면서 뭔가 쏟아붓는다는 느낌을 느꼈다. 내속에 뭉쳐 있던 것들이 서로 먼저 나오려고 서로 싸우는 것을 느꼈고 그것들이 내가 쓴 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내가 지난 3년 동안 쓴 브런치 북들은 나의 부끄러운 감정들이 토해진 곳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싸우고 있다.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이 감사함으로 위로를 받고 위로를 주고 한다.
더 사랑하기로 했다. 일부러 더 사랑해 보자고 생각했다. 내가 더 사랑하면 상대방이 언젠가는 감동 먹어서 나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더 오래 기다리기로 했다. 언제까지라는 단정을 아예 빼버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보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역시 그것으로 감동 먹어서 나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더 기도하기로 했다.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그러다 보면 그래서 역시 그것으로 말미암아 감동해서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큰 은혜를 언젠가는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일 예배를 보고 나서 린필드 어느 길을 걸었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코너길을 보았다. 순간 저 코너를 돌면 뭐가 있을까? 알 수가 없지. 왜냐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니까.
62 Tryon Road, Lindfield
인생이 그런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걷는다. 한번 가본 것을 다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힘들고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도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