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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도 있다

by BM

한국에 살 때 근처 아차산이 있었다. 아주 높지 않고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서 주말에 가끔씩 갔던 기억이 난다. 사실 산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산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힘들게 땀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는 그 과정이 싫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아차산을 올라갔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상에 다 올라가서 바라보는 그 광경이 너무 좋았다. 등줄기에 땀이 적당이 흘러내릴 정도 되면 도착해서 물을 한 모금 축이면서 발아래로 동네를 쳐다보면 뭔가 이룬 것 같고 세상이 내 발끝에 있으니 내가 좀 대단해 보이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산행은 항상 오르막으로 올라가는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올라갔으면 그다음에는 항상 내리막길이었다. 입구에서부터는 정상까지 계속 오르막길일 뿐이다. 하지만 다 오른 다음에는 반대로 내리막길이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계속 오르막길만 걸어가는 것 같은 고난 같은 삶이 계속되는 것 같아 보여도 영원히 오르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내리막길을 만나서 조금은 수월하게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 나도 한때 - 나는 왜 항상 오르막길만 가는 걸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할 때가 있었다. 회사에서 늘 어려운 일들이 나에게 주어졌으며 하나가 끝나면 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곤 했었다. 다른 동료들은 늘 쉽고 힘들지 않은 일들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슬럼프라고 생각하고 다른 팀으로 옮긴 적도 있었다. 번아웃이라고 생각해서 며칠씩 일을 안 하고 멍 때리는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내가 가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린 적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저 잠시만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이었다.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런 긴 오르막을 올라가면서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좀 더 기다리면 언젠가는 다른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당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사자성어가 "새옹지마"였다. 좋은 일이 어떤 때는 나쁜 일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나쁜 일이 오면 그다음에는 좋은 일이 있으니 인생은 모르는 것이라는 의미다.


결국 긴 기다림의 끝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길고 긴 지루한 삶이 변했다. 무미 건조했던 내 인생에 사랑이라는 색깔을 입히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힘듦이 있더라도 견딜 수 있었다. 큰 변화였다.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은 매일 오르막뿐이었다. 하루하루 경사만 조금씩 달랐을 뿐 늘 숨 가쁜 오름의 연속이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중간중간 그래도 쉬었다가 갈 수 있었던 쉼터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고 감사한 마음이다.


예전에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오르막의 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올라갔다. 정상이 어딘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지 정상인지에는 관심은 없었다. 그저 지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걷다 보면 예전에 아차산을 올라갔던 때와 같이 어느덧 정상에 도달하겠지라는 믿음으로 걸었다.


젊었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그래야만 이 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나 스스로에게 아주 높은 수준의 잣대를 대고 나 자신을 밀어붙여서 더 앞서고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 50대가 넘어서고 나서야 알았다. 더 중요한 건 꾸준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르막길을 매일매일 꾸준하게 걸어가고 견디고 기다리는 그런 것들이 더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꾸준함과 긴 기다림을 가진 자만이 그 길의 끝에 비로소 인생의 수월한 내리막길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의 집에서 린필드로 가는 길에는 긴 오르막이 있다. 그 길을 운전해서 올라갈 때면 늘 약간의 엑셀레이트를 밟아 줘야지만 차가 힘을 받고 올라간다. 너무 세게 밟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게 밟으면 제대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오르막에서 차는 늘 조금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그 큰 덩치의 무게로 올라가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나? 하지만 적당한 힘으로 오르막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그리고 힘을 빼고 가볍게 밟아주면 어느덧 오르막의 끝에 다다른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도 그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때는 그 길이 반대로 참 아름다운 내리막길로 바뀐다. 최근에 이른 아침에 잠깐 그 내리막길 옆에 차를 세워두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내리막길에서 보는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사실 이 길은 사계절마다 길 양쪽에 다른 색의 나무와 꽃들이 핀다. 특히 여름이면 보라색 자카란다가 피는데 너무 아름답다. 이 길을 내려갈 때는 브레이크만 적당히 밟아 주면 된다. 그래서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바깥 풍경을 즐길 수 있다.

Grosvenor Road, Lindfield


인생도 이렇듯 아침에는 오르막길이었다가 나중에 퇴근할 때는 오히려 내리막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늘 오르막길만 간다고만 불평하고 불안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적당한때에 내리막길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꾸준히 오르막을 오르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집에 와서 내리막길 사진을 아내와 딸아이에게 보여주고 여기가 어딘지 아냐고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했다. 내가 웃으면서 어딘지 말해주니 그때야 비로소 "아.... 알겠다" 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길이 그렇게 아름답고 이뻤나?"라고 했다. 우리는 오르막길에서의 힘듬은 늘 기억하지만 내리막길에서 본 아름다웠던 풍경은 일찍 까먹는다.


인생은 늘 오르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리막길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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