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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자

by BM

지난주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독감)으로 인해 아내와 나는 거의 일주일을 침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은 나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내 몸의 면역력을 지키고 있던 나의 병사들을 처참히 물리치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전승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와서 자리를 잡았다.


뒤늦게 좋다고 하는 약들을 쏟아 넣어면서 지원병을 보냈지만 이미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은 불청객은 끄떡도 안 했고 되려 점점 더 자신 만만해지고 강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아내와 나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걸려보는 독감이라서 세상에 이렇게 아픈 것이 있었던가 농담반 진담반을 섞어 가면서 아내와 나는 서로를 위로해 주면서 빨리 낫기를 기도했다. 호주에서는 한국과는 달리 감기정도로 병원에 찾아가면 의사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냥 집으로 보낸다. 그냥 집에 가서 푹 쉬고 비타민 약 있으면 적당히 먹고 그리고 슈퍼마켓에서 누구나 살 수 있는 감기약 먹으면서 회복하라고 하는 것이 전부다.


처음에 아내와 나는 그런 종류의 감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 뭔가 평소 감기랑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내가 먼저 사경을 헤맬 정도로 열이 오르락 내리락을 했으며 마치 온몸을 누군가가 방망이로 두들겨 패는 듯한 통증이 지속되었다. 순간 불현듯 몇 년 전 아내를 데리고 호주 응급실로 달려갔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서 아내에게 응급실을 가자고 했더니 아내는 결국 고집을 부리고 가봤자 별것 없다는 말을 하면서 집에서 견디기로 했다.


다음날 도무지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인해 24시간 문을 여는 동네 병원을 찾아서 의사를 만났고 의사는 단순 감기가 아니라 독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독감약을 먹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했다. 48시간 내에 먹어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항생제 처방을 받아서 집으로 왔다. 다행히도 항생제 약을 먹고 난 후 증상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빨리 병원에 안 가고 집에서 버틴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내와 나는 다른 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 같이 살면서 알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는 아플 때 나타난다. 아내는 아픈 것에 대해서 별로 예민하지 못하다. 웬만해서는 아픈 티를 안 내고 병원도 잘 안 가는 편이다. 아내가 병원에 가면 진짜 아픈 것이다. 반면에 나는 조금만 아파도 엄청 예민하다. 나는 일단 아프면 걱정이 많아진다. 건강 염려증이 있다고 인정한다. 아픈 기간 동안 생각이 많아지고 걱정도 많아지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내가 아프면 아내는 늘 아픈 원인보다도 나의 이 예민함과 건강 염려증으로 더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번에도 아내와 나는 하루 이틀정도의 갭을 두고서 독감에 결렸다. 물론 아내가 먼저 걸리고 그것이 나에게 옮아온 것 같은데 아무튼 아내는 아픈 내내 별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반면에 나는 아픈 내내 예민하게 굴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참다 결국엔 한 소리했다.


여보, 제발 좀 기다려. 시간이 지나가게 좀 내버려 둬.....

그 말을 듣는데 얼마나 창피한지 그리고 또 얼마나 아내에게 미안했는지. 똑같이 독감에 걸려서 힘들게 지내고 있는데 나는 계속 짜증과 예민함으로 아내를 그리고 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이었다. 아내의 말처럼 이왕 감기는 왔고 걸렸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큰 병이 아니니까 그냥 좀 진득이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나의 건강 염려증은 독감의 고통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고 말았다.




어느덧 5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 40대에 나는 사는 동안 지금의 나이쯤이면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던 마치 고슴도치 같이 내 몸에 날카롭게 붙어 있던 몸 안의 가시들이 점점 없어지거나 있어도 좀 무뎌지기를 기대하곤 했다. 아이들도 그때쯤이면 다 성장하고 아내와이 둘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기는 그런 여유 있는 생활들을 상상하곤 했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그 시간이 왔을 때 나는 알았다. 변하는 것은 없구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 같은 고민들이 다시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나고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들의 또 다른 고민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역시 세상은 인생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그나마 정말 다행인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아내와 같은 사람을 보내줬다는 것이다. 나보다는 좀 덜 예민하고 나보다는 좀 덜 걱정하고 나보다는 좀 덜 염려하는 아내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은 적이 많다. 요즘 아이들이 자주 말하는 MBTI에서 아내는 'E'이고 나는 'I'이다.




감기는 결국 그 후로 1주일을 넘게 낫지는 않았다.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정말 내가 감당할 만큼의 시련을 주셨다.


그 시련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아내도 나도 둘 다 직장에 복귀했다. 어느 프로선수말처럼 100% 완벽한 몸으로 운동한 적이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완벽하게 낫고 일하러 나갈 수는 없다. 조금 모자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감기가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감기 때문에 주일 예배를 못 갔다. 그래서 이번 주는 린필드 산책도 못했다. 매주 가던 곳을 못 가서 그런지 그리웠지만 그것조차도 기다리는 여유를 갖기로 했다.


가끔씩 린필드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고개를 들어 밖을 쳐다보면 저렇게 파란 하늘과 초록의 잔디가 눈에 들어온다. 한참을 그 풍경을 쳐다보고 있으면 내 몸속의 가시들이 잦아들고 염려가 사라지고 평온함이 온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순간이다.


The Runaway Spoon, Lindfield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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