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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by BM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저의 글을 기다리셨던 분이나 근황에 대해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메인 글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업데이트를 드리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올린 것이 10월 초였던 것으로 기억되네요. 어차피 10월은 회사 일로 인해 무척 바쁠 것이라고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 달 동안은 브런치 연재를 못할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10월은 전쟁 같은 달이었습니다. 8부 능선에 올라가면 또 다른 적이 나타나서 물러서야 했고 그러기를 몇 번을 반복하다가 그래도 고지를 점령하고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모두들 그것을 해 냈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하고 맘껏 즐기고 있을 때 어디서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적이 나타나서 결국은 11월 초까지 애를 쓰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제품은 그렇게 론칭을 하게 되었고 새로 태어난 자식 같아 보였습니다. 다 끝나고 맥주를 한잔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전쟁을 내년에 또 해야 하는데 어쩌지? 더 체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사이 어느덧 시드니의 여름이 바로 발 앞에 와 있더군요



그 전쟁의 끝자락 즈음에 아내가 한국으로 갔습니다.


가족들과 이렇게 멀리 살다 보면 늘 마음 한편에 미안함이 자라고 있습니다. 바로 부모님에 대한 효도.


영상통화로 자주 얼굴을 보곤 하지만 그들의 소소한 일상을 같이 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당신들이 힘들고 아프실 때 같이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픔으로 쌓여서 마치 나무가 자라듯이 자랍니다.


새해를 시작하면 늘 세우는 계획이 일 년에 한 번씩은 고국 방문을 해야지라고 하지만 늘 지켜지지 않는 계획 중에 하나입니다. 일하느라, 아이들 돌보느라 그리고 사실 금전적인 이유도 한몫을 합니다.


늘 같이 고국 방문을 하던 우리가 올해는 아내 혼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를 시드니 공항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이 좀 어색했습니다. 다행히 둘째 딸이 같이 동행해 주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덜 적적했습니다.


아내가 한국으로 간 사이에 나는 회사에서 전쟁을 이어갔고 그로 인해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남들은 혼자이니 좀 더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면서 부러워했지만 정작 나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들었습니다.


아무리 일이 많고 바빠도 한국처럼 야근을 하는 것은 아니니 정시에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늘 있던 그 자리에 누군가가 없으니 자꾸만 그 자리를 쳐다보게 됩니다.


평소에도 아내와 나는 둘 다 각자의 일을 하고 있고 바쁜 이유로 평일 시간에는 같이 지내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매일 저녁때면 같이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아내가 없고 나서야 우리의 침대가 이렇게 넓었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내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3주니까 금방 시간이 지나갈 거야라고 했던 나의 생각은 오만이었습니다. 세상의 시계가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천천히 감을 느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나고 점심을 먹으면서 느끼고 잠자리를 들 때마다 보게 되는 그녀의 빈자리가 우주처럼 큰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시 오면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습니다.


그녀와의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나의 교만이었는지 새삼스럽게 반성하고 느끼는 중입니다.


사실 10월의 그 전쟁을 치러면서도 브런치 글을 못 쓸 상황은 아니었지만 내 글을 쓰는 대신 다른 작가님들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 글만 소중히 생각했지 다른 분들의 글에 대해서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하게 읽으면서 오히려 브런치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작가님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명상을 하게 되었고, 어떤 분이 올린 에세이를 읽고서는 공감하고 또 감동하였으며, 누군가의 인사이트를 보고는 동기부여도 받았고 무엇보다도 나의 고민들을 다른 분들도 다 같이 하는 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뭔가 위로와 위안을 받았습니다.


브런치도 마치 그런 빈자리였습니다. 매주 한 번만 올렸던 글이었지만 그것은 나의 소중한 일상 중에 하나였으며 늘 내 옆을 지켜주었던 것을 모르고 지냈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어느덧 문득 그 빈자리가 느껴졌으며 그래서 다시 글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시드니는 어느덧 여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보라색 자크란다(Jacaranda) 꽃잎이 올해는 유난히 더 오랫동안 이쁘게 보입니다. 이 맘 때에는 시드니의 어느 길을 운전해 가더라도 이 보라색 꽃을 흔하게 보게 되는데 보통은 늦봄에 몇 주 동안 피었다가 심하게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다 지는 경향이 있는데 올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오래 우리를 즐겁게 해 줍니다.


어쩌면 이 나무도 곧 올 자신의 빈자리가 무섭고 그래서 너무 빨리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좀 더 힘들게 그 자리를 애써 버티고 채우고 있어 보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아내가 돌아옵니다. 그러면 그녀는 다시 빈자리를 채워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 기다림이 있어서 좋고 그래서 인생이 살만 한 것 같습니다.


아내가 오면 제일 먼저 같이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자카란다가 핀 거리를 걷고 카푸치노와 라테를 시켜놓고 수다를 떨고 싶습니다.

Nelson Road, Lindfield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도서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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