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란 미치광이인가

앤 섹스턴, <시인이 분석가에게 말했다>

by 난란
나의 일은 단어들. 단어들은 상표 같아요,
아님, 동전 같기도, 더 쳐주자면, 벌 떼 같기도 해요.
고백하자면 오직 사물의 원천만이 나를 깨부술 수 있어요.
마치 단어들이 노란 눈과 말라 버린 날개에서
해방되어 다락에서 죽어간 벌처럼 헤아려지듯.
나는 늘 잊어야만 하지요, 어떻게 하나의 단어가
다른 단어를 고를 수 있는지, 하여 마침내
내가 말했을 어떤 것을 얻을 때까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당신 일은 내 단어들을 지켜보는 것. 하지만 난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아요. 난 최선을 다해 일해요, 가령
내가 니켈 머신을 찬미하는 글을 쓸 수 있었던 네바다의
그 어느 날 밤; 행운의 화면 위로 벨이 세 번 딸랑거리며
어떻게 마법 같은 잭팟이 터졌는지 말하며,
그런데 당신이 만약 이게 아니라고 말한다면,
나는 점점 약해지지요, 내 손이 그 모든 믿음의 돈에
둘러싸야 얼마나 우습고 우스꽝스럽고
번잡하게 느껴졌는지를 기억하며.

앤 섹스턴, <시인이 분석가에게 말했다>



정신병과 낙태 같은 개인적 소재를 가감없이 드러낸 고백시의 대표 주자이자 자살로 삶을 마감한 앤 섹스턴의 이 시는 시의 특성과 더불어 시를 '살아가는' 시인이 미치광이로 다루어지는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의 일은 단어들"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곧 단어란 "상표", "동전", "벌 떼"라고 은유의 망을 펼쳐 놓는다. 단어는 대상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이다. 상표는 상품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도구이다. 동전은 모든 대상을 교환 가능한 대상으로 변환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도구이다. "나의 일", 곧 시란 일상에서 지나칠 수 있는 '당연한' 것에 새로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쉬클로프스키는 시의 이러한 특성을 낯설게 하기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새롭게 바라보기의 대상이 사람으로 확장될 때에 대하여 이야기한 글은 아래 링크)





단어는 사물을 온전히 드러내주지 못한다. 그것이 단어의 한계다. 그럼에도 시인은 계속해서 단어를 찾아 헤맨다. 대상에 꼭 맞는 단어를 찾기 위해서. 시지프스의 형벌 같은 시인의 무한한 탐구를 멈추게 하는 것이 바로 "사물의 원천"이다. 그것은 "벌 떼"와도 같은 시인의 "일"을 "노란 눈과 말라 버린 날개에도 해방되어 다락에서 죽"도록 허락한다. 영원히 꽃과 꿀을 찾아 헤매는 벌 떼는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즉 "어떻게 하나의 단어가/다른 단어를 고를 수 있는지, 하여 마침내/내가 말했을 어떤 것을 얻을 때까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시를 낳는 생각의 구조이다. 이것을 잊는다면? 명확한 대상과 명확한 단어, 일대일로 대응하는 정상적이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정신분석가, 정신병을 고치는 의사 앞에 앉게 된 까닭이다.


"당신", 정신분석가의 일은 "내 단어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내담자의 발화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 그가 가지고 있는 고통이나 비밀,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일이다. 프로이트가 꼬마 한스가 지닌 말 공포증을 아버지에 대한 공포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시인은 하나의 의미를 수천 가지의 단어와 연결시키고, 분석가는 수천 가지의 단어를 하나의 의미로 정의내린다.


"난/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시인의)일"을 한다. 니켈 머신(핀볼 머신)을 찬미한다. "행운의 화면 위로 벨이 세 번 딸랑거리며/어떻게 마법 같은 잭팟이 터졌는지"에 대해서 수천 마리의 벌떼를 날려보낸다. 분석가는 시인의 말을 미치광이의 말로 규정한다. 그 수천 마리의 벌떼를 향해 "당신"(분석가)이 "이게 아니라고 말한다면/나는 점점 약해"진다. 낯설고 새롭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쇠약해지고, "마법 같은 잭팟"의 광경은 "우스꽝스럽고/번잡"하며 따분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장면으로 격하된다. 그것이 바로 '정상'이기 때문에.


금화처럼 반짝이는 벌 떼는 다락방에서 해방되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분석가의 입에서 분사되는 살충제 같은 말에 숨이 막혀 죽어갈 뿐이다. 이는 시를 '살아가는' 시인에게 미치광이라는 이름표를 멋대로 붙였다가 마음 대로 떼어 주고 치료비 명목으로 목숨도 함께 떼어 가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섹스턴을 담당한 의사는 치료라는 명목으로 성관계를 요구했으며, 섹스턴은 이에 대해서 혼자 감당해야 했다고 한다. (220쪽)


알 수 없고 복잡하며 다의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이란 미치광이인가? 그렇다면 그 미치광이를 감옥과 병원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집어 넣어 입맛대로 늘리거나 잘아 내어 정상인으로서 죽게 만드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그 말에 숨겨진 새로운 시선을 경험하고 일상에서 벗어난 진리를 찾는 것이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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