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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05. 2024

내 자신이 먼저였던 적은 언제였을까

1.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7)

면사무소 바깥으로 해가 가라앉는지 주차장에 늘어선 차들의 색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김은지가 핸드백에 손을 넣어 차키를 움켜쥐었다. 그런 걸 틀어쥔다고 속에서 꽉 막혀있는 그 무언가를 잡아 끄집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습관적으로 자꾸 무언가를 단단히 그러쥐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졌다.

병원에서 내어준 진단서를 내미는 것이 뭐 그리 망설여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본인의 상태가 누구를 걱정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보다 그녀를 둘러싼 다른 이들을 먼저 챙기다 보니 지금의 사태에 이른 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동안 못 보겠네요.”


면장이 던지듯 말을 걸었다. 김은지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목소리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돌아서지 않은 것이다. 기실 그가 김은지를 걱정해서 한다고 던졌던 말들이 진실로 그녀를 위로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미안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무심하게 대꾸했다.


“예.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


김은지와 무례는 지구본의 양극점처럼 결코 만날 수 없는 한 쌍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던 그 행동을 마침내 실행에 옮겨 본 김은지는 일말의 쾌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내내 갑갑하던 마음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든 듯했다. 운전석에 앉아 물끄러미 백미러에 비친 면사무소 건물을 바라보던 김은지는 갑자기 무슨 마음이 든 것인지 시동을 끄고 차 문을 도로 잠갔다. 아무렴, 휴직계를 냈다고 해서 등록 차량 명부에서 그녀의 차량번호를 당장 삭제하는 것이야 아닐 터였다. 김은지는 한결 산뜻해진 기분으로 차를 놔둔 채 주차장을 벗어났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이, 무작정 걷다 보면 어쩐지 조금씩 가벼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김은지는 원래 이 지역 토박이였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만 잠시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졸업하자마자 부모님 뜻에 따라 다시 강릉으로 금세 돌아왔다. 그녀라고 서울 생활을 동경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졸업 직전에 면접까지 본 회사도 두엇 있었음에도, 부모님의 성화에 김은지는 그때까지 분명히 존재했던 자신의 마음을 접어둔 채 집으로 돌아왔고, 남편을 만났고, 아이들을 낳았다. 공무원으로서 성실하게 살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착실하게 삶을 꾸렸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한 것이 없음에도 왜 오늘에 이르러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아야 했는지 김은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이라도 갔다면 덜 우울했을 텐데,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실수를 저질렀기에 마음이 균형을 잃은 듯한 불안을 떠안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기에 김은지의 우울은 한층 더 짙어졌다.

도회적인 삶을 동경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해서 우울했을까. 혼자 곱씹어 보면 그 이유는 아니었다. 직장에서 나오면 바로 시골스럽게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는데 그 익숙한 느긋함이 좋으면 좋았지 진저리가 난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발이 쭉쭉 앞으로 나가는 것과는 반대로 생각은 계속 한 자리를 맴돌았다.


에- 옹.


모든 상념을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김은지가 멈춰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릉에서도 원체 외곽지역이라 간간이 서 있는 전봇대 아래에, 습기를 잔뜩 먹은 택배 박스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연약한 생명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는 바로 그 답답한 작은 상자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에- 옹.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존재가 다가왔음을 느낀 것인지 울음소리가 조금 더 절박하게 커졌다. 겉옷이야 바닥에 질질 끌리든 말든, 다급하게 쪼그려 앉은 김은지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박스를 열었다. 예상대로 필사적으로 갇힌 안쪽면을 긁으며 울고 있던 것은 덩치가 작은 고양이었다. 김은지는 그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꺼내주어 고맙다는 듯, 고양이가 길게 울더니 김은지의 무릎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김은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품에 붙여 안았다. 자신이 외면하면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운명을 만날 길이 없는 생명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웬 고양이야, 엄마?”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집에 붙어 있는 법이 없던 열다섯 살 딸 나예가 반색을 했다.


“엄마도 모르겠어. 이게 뭔 일이라니. 길에 버려져 있더라구.”

“우리가 키울 거야?”

“어떻게 그래. 엄마는 동물 같은 거 키워본 적도 없고, 그리고 얘도 거기다 그냥 두면 죽을 것 같아서 일단 데리고는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 이거 무슨 종인지 알아, 엄마. 얘 스코티쉬 폴드야.”


겉옷을 벗다 말고 김은지가 놀라서 딸을 돌아보았다.


“넌 어떻게 그런 걸 바로 알아?”


나예가 어깨를 들썩이며 히죽거렸다.


“내가 공부를 싫어해서 그렇지 관심 있는 분야는 다 알거든.”

“예쁜데 왜 버렸을까.”

“엄마는, 동물 유기하는 사람들이 뭐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버리는 줄 알아?”


톡 쏘아붙인 나예가 거리를 두고 가만히 고양이를 들여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무서울 거 아냐. 나는 너 다치게 할 의사가 없다고, 알려주려고.”


나예는 진지했다. 그 모습을 보던 김은지가 혼잣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네가 순간순간 뭘 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아는구나.’ 김은지 자신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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