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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03. 2024

삶이란 행불행이 나란히 손을 잡고 앉은 둥지일지도

L.M.몽고메리, 빨간 머리 앤

우리가 세상에서 지워진 뒤에도 영원을 살고 있을 것 같은 앤 셜리, 안녕해요? 


서포모어 징크스라는 말을 쓰기에는 많이 우습지만, 처음은 어떻게든 했어도 두 번째엔 눈앞이 하얗게 바래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달리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의기양양함이나 원대한 꿈같은 것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고요.


수신인을 정해두지 않고 첫머리를 열어놓고 첫 문장을 쓰고 나면 놀랍게도 이 편지를 보내고 싶은 상대가 떠오른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과연 내가 환영받을 수 있을까 불안에 떨었을 당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뭔가를 쓰고, 그리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항상 그런 불안감을 안고 있는 듯해요. 내 손을 빌어 태어난 이것이, 과연 누군가에게는 환영받을 수 있을까? 


혹시 절 데리러 오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거든요. 못 오시는 이유를 이것저것 상상하고 있었어요. 만약 아저씨가 오늘 밤에도 오지 않으시면, 기찻길을 따라 내려가 저기 모퉁이에 있는 커다란 산벚나무 위에서 밤을 지새우려고 마음먹었어요. 조금도 무섭지 않았을 거예요. 온통 하얗게 꽃이 핀 산벚나무에 올라가 달빛을 맞으며 자는 것도 참 멋지잖아요. 대리석으로 꾸민 방에 머무는 거라고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밤엔 안 오시더라도 내일 아침에는 꼭 저를 데리러 오실 거로 믿었어요.” -1권, 26쪽


그래요. 어딘가의 누군가는 잠깐이라도 내게 시선을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믿음이 없이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겠죠.


어릴 때는 그저 당신이 어디서든 근사한 공상을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만 생각했어요. 어른이 된 이후에야 그렇게 밤을 지새우면서 그럼에도 누군가는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 것을 각오했을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느끼는’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그런 생의 태도란, 어디에서 익힌 것일까요. 고아였던 당신이 부모님을 보고 배웠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운데 말이에요. 당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기에 때때로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토록 어여쁜 생각을 많이 자아냈을까요. 당신에게도 심술궂고, 무얼 하건 트집을 잡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만큼이나 즐거웠다. 아니, 그보다 더 즐거웠다. 이 길의 끝에서 집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 무렵에 마차는 화이트샌즈를 지나 해변 길로 접어들었다. 저 멀리 엷은 자줏빛 노을이 진 하늘을 배경으로 에이번리의 언덕이 어둑하게 나타났다. 언덕 뒤쪽에서는 바다 위로 달이 떠올랐다. 달빛을 받아 온통 밝게 빛나는 바다는 평소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굽이치는 해변 길을 따라 바다가 육지로 쑥 굽이쳐 들어간 곳에서는 잔물결이 춤을 추며 반짝였다. 물결은 아래쪽 바위에 부드럽게 부딪쳤고 맑고 상쾌한 밤공기에는 바다 내음이 가득 섞여 있었다.
앤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 살아 있다는 것도,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참 좋다.” -1권, 357쪽


이런 것을 깨달았던 나이가 결코 어른일 때가 아니었잖아요. 오래도록 천진난만했던 건가요, 혹은, 어릴 때부터 세상이 결코 따뜻한 곳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한사코 당신의 세계를 아름답고 너그러운 공상과 생각으로 지어 올렸던 건가요. 어느 쪽이든 당신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정한 것에 끌린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문학의 세계 속에서 태어난 이후로 그렇게 사랑받았던 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요. 매사 긍정적이고 타인의 좋은 면을 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잖아요, 앤 셜리는.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못 봤어요. 하긴 당연한 일인지도요.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아졌거든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랑스럽고 예쁜 생각이 들면 그걸 보물처럼 가슴에 간직하는 게 더 좋아요. 입 밖에 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1권, 384쪽


이거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슬플 정도로 잘 알죠. 언젠가부터 나도 내 속내를 굳이 드러내어 말하지 않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당신의 이유와는 좀 달라요.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안 보여서요. 그렇지만 혼자 간직하고 가끔씩 꺼내어 보는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아요. 어떤 기분인지 알죠? 적어도 내가 쌓아둔 보물이 결코 적지 않아서, 나를 수시로 행복하게 해주는 거 말예요.


“쯧쯧, 더는 말하지 않아도 돼. 별일 아니니까. 맞아, 대단한 일이 아니지. 사고는 언제든 생기기 마련이잖아. 나도 성급하게 굴 때가 있어. 심하게 그럴 때도 있지. 하지만 난 생각하는 걸 여과 없이 말해버리니까 사람들은 그걸 보고 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거야.” -2권, 40쪽


해리슨 아저씨가 이렇게 말할 때는 한 대 때려주고 싶더라고요. 당연한 소리 하지 말라고요. 제발 여과기 좀 거쳐서 말해주면 안 되냐고. 너무 화가 날 때는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처럼 인내심 있게 저런 태도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닐 거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하는 방식이 모든 관계를 훼손해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알면서도 왜 그러냐고!


“너 혹시 그거 알고 있니? 사람들이 어떤 걸 말해주는 게 자기의 의무라면서 이야기를 꺼낼 때는 기분이 상할 걸 각오하고 들어야 해. 왜 사람들은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당사자에게 말해주는 게 의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걸까?” -2권, 82쪽


이런 식으로 아무도 지워준 적 없는 쓸데없는 의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아니잖아요!)를 마치 고결한 시민의 덕목인 것처럼 말하면서 굳이 전해줄 필요 없는 말을 전하는 사람들도 정말 싫단 말이에요. 당신이 말한 대로예요.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나에 대해 들었던 좋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법은 없더군요. 남들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한 것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알려줘야 한다고 믿는 그 마음은 대체 뭘까요? 그럴 때 꼭 빠지지 않는 말이 있어요. 책임감이니 염려니 하는 것들. 멀쩡하게 좋은 의미를 가진 말들까지 진창에 빠트린다는 점에서 더욱 죄질이 나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또렷한 목표를 갖고 사는 당신이 부러웠어요. 내겐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이젠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할 때 온갖 이유를 들어 방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이 만나게 되네요. 그런 걸 보면 역시 삶의 목표라든가, 성취하고 싶은 뭔가가 있다면 일찌감치 선언하는 쪽이 좋으려나요. 

난 이러저러한 것을 하고 싶어, 할 거야. 그러니까 나를 방해하지 말아 줘. 설령 줄곧 실패하더라도 막지 말아 줘,라고. 당신이 되고 싶어한 것과, 인생을 두고 이루고 싶어한 것은 달라 보이지만 결국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이 말을 찾은 순간 알게 되었네요. 나는 여전히 찾는 중인 것도 같아요.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요. 

어때요, 당신은 자신의 삶에 만족했어요? 내가 아는 앤 셜리라면 틀림없이 그렇겠지요.


“사람들이 지식을 쌓도록 도와주는 건 정말 고귀한 목적이야. 하지만 난 그것보다는 그들의 삶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싶어. 나 때문에 사람들이 더 즐거워졌으면 좋겠어.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어.” -2권, 84쪽


“하지만 난 네 이름이 케런해퍼치였어도 좋아했을 거야. 자기 이름을 멋지거나 추하게 만드는 건 오로지 그 사람에게 달렸다고 생각해. 지금 난 조시나 거티 같은 이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지만, 그들을 알기 전에는 그게 아주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거든.” -2권, 283쪽


다이애나의 이 말이 눈물 나게 좋네요.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가 있다니, 운이 좋아요. 친구 운이라면, 어쩌면 나도 조금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신도 책을 많이 읽었으니 알겠지만,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나 봐요. 누구나의 삶에도 어느 정도의 아픔과 상실이, 그것을 상쇄할 만큼의 기쁨과 행복이  공존한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면서 편지를 닫으려고요. 비가 와서 날씨도 우울하고 기분도 그저 그런데, 당신이라면 분명히 그럼에도 분명히 비 오는 날은 이러저러해서 좋은 날이에요! 라고 명랑하게 외칠 것만 같아서 웃게 되네요. 


잘 지내고 있어요, 조만간 또 만나러 갈게요. 이만 총총.


 http://aladin.kr/p/lzz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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