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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17. 2024

열정은 사라져도 열정의 상흔은 남아있게 마련이니

비타 색빌웨스트, 사라진 모든 열정

안녕하세요, 벅트라우트 씨.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이름을 모릅니다. 슬레인 백작부인 데버라가 그러셨듯, 그냥 벅트라우트 씨라 불러도 언짢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슬레인 백작부인, 제가 개인적으로 부인을 아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돌연 그렇게 되었지만,” -88쪽


이라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선생님은 첫인상을 상당히 - 그러니까 본인의 사람 보는 눈을 꽤 신뢰하시는 것 같거든요. 제가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저 또한 제법 일반적이지 않은, 자기 좋을 대로의 미학을 좇아 사는 사람이어서 흥미로워하시지 않을까 미약한 기대를 가져봅니다. 혹은 이런 시건방진 젊은 것을(벅트라우트 씨께는 틀림없이 그렇겠죠!) 보았나 하며 이 글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건 그것대로 즐겁습니다. 


“나는 어째서 이 집에 들어오겠다는 그 많은 사람을 거절했겠어요? 그 두 가지를 합치면, 각자 포물선을 그리다가 한 지점에서 만나잖아요. 그렇죠? 난 운명의 지질학적 설계를 굳게 믿는답니다.” -84쪽 


와 같은 것을 믿는 분의 단호한 거절이라면 마땅히 수용해야죠. 저는 어정쩡하게 에두른 말보다 단정하고 깔끔한 거절을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늘 자신만의 미학을 가진 노신사숙녀분들께 아주 관심이 많았습니다. 미학을 철학으로 바꿔 말씀하셔도 좋겠지요. 


그것이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어떠한 신념일 때, 타인의 삶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잣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서사의 축으로서 세운 것일 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 말이 조금 우습게 보일 수는 있지만요, 벅트라우트 씨. 저는 쉽게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답니다. 그게 소설 속의 인물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아요(믿거나 말거나). 심지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슬레인 백작부인께도 상당히 공감은 했지만 그분을 최고로 마음에 남는 인물로 치진 않았단 말이에요. 만약 그랬다면 이 편지의 수신인은 그분이 되었겠죠. 그런데 어쩐지 까탈스러운 노인네 같은(죄송합니다) 선생님을 고른 이유가 무엇이냐, 그걸 먼저 따지고 들자면 선생님의 반전 매력 탓이었다고 말씀드려야겠어요.


“요즘 들어 일흔 살 아래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를 못하겠어요. 젊은이들은 자꾸 다가올 수고로운 삶을 바라보게 하잖아요.” -84쪽 


하고 단호하게 교류할 수 있는 친구의 범위를 제한하는 말씀을 듣다 보면 까다롭기는! 싶으면서도 그 말씀을 하시는 뜻을 알겠단 말이죠. 게다가 백작부인을 오랫동안 모셔온 하녀는 선생님을,


저누가 보기에 벅트라우트 씨가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극히 기품 있었다. 분명 별나기는 했지만 신사였다. 진짜 신사. 생각하는 게 기이하면서도 멋졌다.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일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데카르트나 만족스러운 패턴의 특질 같은 주제를 끄집어냈다. 여기서 패턴이라는 것은 벽지 무늬가 아니라 삶의 패턴을 뜻한다. -98쪽


라고 평가했단 말입니다. 단순히 내가 한때 이러저러한 사람이었어, 늬들이 알아?라고 우리는 듣기에 진저리를 치는 (다 늙어 부리는 구차한) 인정욕구의 서사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낸 삶의 전반부의 경험을, 다져진 지성으로서 관조하여 지혜로 끌어내어 절로 감탄하게 하는 현명한 노인을 만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대체로 모두가 동의할 거라 생각합니다. 


저누가 벅트라우트 씨를 보고 감탄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고요. 그뿐입니까?


벅트라우트 씨는 작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워낙 그런 면에 민감한 백작부인 쪽에서 당황하지 않고 받을 수 있을 만한, 값비싸지 않은 소소한 선물로 한정했지만 말이다. 때로는 정원에 심을 화초였고, 때로는 신기한 광채를 내뿜은 꽃병이 빈방 창틀에 놓여 있었다. -99쪽


얘기 좀 해주시죠,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이런 센스 넘치는 노인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이게 전부가 아니더군요.


그녀가 서서히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벅트라우트 씨는 소소한 재능이 무척 많았는데, 꽃다발을 만드는 재능도 상당했다. 색과 형태를 아주 대담하고도 의외의 방식으로 조합해 생화 다발이라기보다는 정물화 같고, 그러면서도 그림에 비할 수 없는 생기를 지닌 결과물을 내놓았다. -101쪽 


사실 저를 제일 감탄하게 했던 건, 선생님은 곁에 두고 싶은 사람과 결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을 명확하게 나누었다는 겁니다. 가장 부러운 재능이고, 본받고 싶은 실천력입니다. 저도 꽤나 관계를 잘 정리하는 걸로 이름이 있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계들은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얽혀 있어서 도저히 칼같이 잘라내지 못하고 덜 뜯긴 채 너덜거리는 꼴을 그대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나이를 좀 더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걸까요. 그런 걸까요…


그런 차원에서 이 말씀은 절대로 흘려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였습니다.


“살면서 다른 사람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아무리 잦을지라도 수많은 사람을 약간씩 기쁘게 하느니 한 사람을 아주 기쁘게 하는 게 낫다는 것이 내 철칙이었어요.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이 정말 많았지만 후회스러운 경우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고 믿어요. 인생은 금방 지나가요, 백작부인. 그러니 휭하니 지나갈 때 그 꼬리라도 붙잡아야죠. 어제나 내일은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오늘조차 불확실한데 말이죠.” -108쪽  


그러게요. 당장 내일이 어찌 될지, 오늘조차도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마당에 왜 그리 허망한 일들에 마음을 쏟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로 여겼던 백작부인의 인생 끄트머리에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을 두고,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에 선생님이 보인 반응은 지극히 온당하다고 느꼈습니다. 


벅트라우트 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캐리가 싫었다. 그렇게 민감하고 솔직한 자기 친구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냉혹하고 위선적인 딸이 태어날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는 슬레인 백작부인을 떠나보낸 자신의 커다란 상심을 표정으로든 말로든 절대 캐리에게 내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251쪽


원하던 모습의 데버라로 살지 못하고 슬레인 백작부인으로 생을 마감했던 친구를 위해 선생님이 보이셨던 모습은 자못 인상적이었어요. 끝끝내 본인이 기대하던 거대한 유산을 쥐지 못해 속물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딸을 향해 그저 묵묵히 시선을 던졌을 뿐이었지만, 그것은 


드문 영혼 운운하던 말은 다 타고 재만 남았다. 벅트라우트 씨와 고셰런 씨는 어머니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그런 동맹 앞에서는 어떤 말로도 진실을 덮을 수 없었다. -255쪽


정말로 뭘 모르던 쪽은 누구였는가를 명백히 드러낸 조용하고 힘 있는 항변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선생님을 알게 되어 정말 좋았어요. 존경할 만한, 그리고 위트도 있고 센스도 있는 현명한 노인과 친구가 되는 건 언제든 환영할 만한 일이거든요. 무엇보다도 선생님 같이 멋진 인물을 조형한 사람이 바로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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