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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10. 2024

모두에게 동등한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님께.


처음으로 변호사님의 이름을 읽게 된 것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 영어 수업 시간에 과제로 「To Kill a Mockingbird」를 읽어야 했던 때였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저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죽도록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16세기 중세 영어가 나을 정도였어요. 왜냐면, 같은 수업을 듣는 애들이나 저나 헤매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요.


세상에,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영문 텍스트의 습격이라니!

이제 갓 ESL 클래스를 탈출한 제게는 고문이 따로 없었다고요. 요즘 소설책처럼 첫 챕터에서부터 주인공을 핵심 갈등의 중심부에 세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7대 대통령을 들먹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조상님들 얘기에 동네 얘기까지, 그 언어에 겨우 익숙해진 참인데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고삐를 맨 건 중국인 친구의 간결한 한 마디였습니다. “걍 닥치고 읽어.” (정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입에 지퍼를 채우고 다 읽었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용 파악은 해야겠고(숙제니까) 다 읽기는 싫었던 저는 유구한 잔머리의 전통에 따라 약삭빠르게 대화만 쏙쏙 골라 읽었습니다. 그런, 등짝 맞아 마땅한 방식의 독법으로도 퀴즈 시험을 패스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디베이트 시간에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입 꾹 닫고 경청만 열심히 했다지요.


그렇게 저는 변호사님을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 정도로 생각하고 영영 잊어버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데 연이란 재미있지요. 한국에 돌아온 후 서점가에서 책 구경하고 다니는 게 취미가 되어버린 대학생은 어느 날 서가에서 묘하게 낯익은 소설을 발견합니다. 습관처럼 휘리릭 책장을 넘겨보다 스카웃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무슨 동창생을 만난 것마냥 반갑더군요. 이젠 정말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볼 때다 싶어서 당장 사들고 왔어요. 그리고 첫 등장부터 변호사님은 범상치 않으셨지요.


우리는 주먹다짐으로 시비를 가려내기에 제법 나이를 먹었고, 그래서 아빠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아빠는 우리 의견이 모두 옳다고 하셨습니다. -16쪽


저는 이 말만 들으면 자동으로 턱수염을 길게 기르신 꼬장꼬장한 어떤 어르신이 생각납니다만… 뭐 어쨌건 부모로서는 이 이상 가는 현명한 대답이 있을까 싶네요.


젬이 못 사는 아이 월터를 집에 초대해 점심을 먹을 때, 스카웃이 월터의 식사법을 꼬집자 집안의 살림을 맡아하는 캘퍼니아가 부엌으로 스카웃을 불러들여 호되게 꾸지람을 하잖아요.


“우리와 다른 식으로 식사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야.” 아줌마가 불쾌하다는 듯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처럼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식탁에서 무안을 줄 수는 없어.” (...)
“한 번만 더 잘난 체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어디 입방아만 놀려 봐! 너희 집 사람들이 커닝햄 사람들보다 잘났는지 모르지만, 네가 그 사람들을 망신 주는 걸 보면 그 잘났다는 것도 별 볼 일 없는 거야. 식탁에서 그런 식으로 굴려면 차라리 여기 부엌에 앉아 먹어!” -55~56쪽


그 시기 미국 남부에서 흑인 가정부가 백인 주인집 딸에게 이렇게 거침없이 훈육할 수 있었음은, 이런 표현은 참 싫지만, 변호사님이 그녀를 아랫사람 취급하지 않고 한 사람의 동등한 인간으로서, 변호사님과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인격체로 쭈욱 대우해 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사람이란 타인의 존중과 더불어 자신을 키워나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스카웃의 이 말은 또 어떤가요.


“아빠는 마당에서 오빠랑 저한테 하지 않으실 일은 집 안에서도 절대로 하지 않으세요.” 나는 아빠를 옹호하는 게 내 의무라고 느끼며 말했습니다. -94쪽


어린 딸이 아빠에 대해 이토록 확신 어린 태도로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핀치 변호사님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 삶의 자세를 견지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죠.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읍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고, 이 군을 대표해서 주 의회에 나갈 수 없고, 너랑 네 오빠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다시는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야.” -148쪽


신념이 시키는 대로 팀 로빈슨을 변호하고,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174쪽


라고 말했듯, 성실하게 살았으며 불우해 보이는 백인 소녀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 흑인을 노래하는 것이 다인 앵무새와 동일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테고요.


“이제 여름이 오면 넌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에 당면할 텐데 그때도 이성을 지켜야 할 거야…… 너와 젬에게 부당하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때로 최선을 다해서 극복해야 할 경우가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느냐 하는 건…글쎄,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너와 젬이 어른이 되면 어쩌면 조금은 연민을 느끼면서, 내가 너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되돌아볼 거라는 사실이야.” -200쪽


신념으로 행동했어도 어린 자녀들에게 미칠 파장을 염려하는 모습은 보통의 아빠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영웅적인 길을 가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 무겁고 큰 게 아닌가 다시금 생각하게 되어요. 한두 사람의 영웅적 인물이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서사는 웅장하고 늘 감동을 주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저 같은 소시민의 바람입니다.

여럿이 조금씩 나눠지고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쪽이 좋습니다.


소명을 나누면 그럭저럭 부담할 만한 작은 책임감이 될 테니까요.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사람 뒤에서 소극적으로


“진 루이즈 양, 너희 아빠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는 아직 잘 몰라. 그걸 제대로 깨달으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거다.” -373쪽


정도의 응원을 보내기보다는, 그쪽이 훨씬 빠르게 ‘더 나은’ 세상을 불러오는데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배심원 여러분, 법정은 제 앞 배심원석에 앉아 계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건전해야만 건전할 수 있습니다. 법정은 오직 배심원단이 건전한 만큼 건전하고, 배심원단은 그 구성원이 건전한 만큼 건전합니다. 배심원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으신 증거를 감정의 동요 없이 검토하여 판단을 내려 이 피고를 그의 가족에게 돌려보내시리라 확신합니다.” -380쪽


아마도 이것은, 그저 평범하고 속된 우리에게 변호사님의 입을 빌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속내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The Pledge of Allegiance에서 언급하듯,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이것이 인간의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가장 큰 믿음이 되기를 바라면서, 핀치 가족 모두의 건강을 빕니다.


http://aladin.kr/p/yGy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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