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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26. 2024

나의 가장 오랜 '소설 속' 친구인 당신, 잘 지내요?

로자문드 필처, 조개줍는 아이들

안녕, 페넬로프. 혹은 퍼넬로피.  


첫 편지를 띄운다면 그건 결단코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내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지만, 내게 소설이란 멋진 신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준 사람은 당신이니까요. 퍼넬로피, 내가 살아온 인생의 어떤 날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내게 가장 오래 머무른 사람은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기억해요. 마치 첫사랑처럼.  


화가였던 당신의 인자한 아버지 로렌스 스턴과, 아버지의 친구의 딸이었으나 당신의 아버지와 결혼했던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어머니 소피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자란 당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요. 심지어 내겐 런던의 오클리 가街는 퍼넬로피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어서, 그 이후의 어떤 소설에서 오클리 가를 다시 만나도 그 누구도 퍼넬로피의 오클리 가에는 아무도 입주하지 못했을 정도였지요. 어째서 오클리 가만이 그토록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을까요. 포스커리스도, 글루체스터도 당신에게는 중요한 장소였는데 내게는 이상하게도 오클리 가만이 기억에 남아 있더군요. 내가 당신만큼 좋아했던 당신의 어머니, 소피가 그곳에서 폭격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일까요.  


“이런, 이런. 난 네가 그렇게 순진한지는 몰랐구나. 내가 얼마나 못난 엄마였는지 모르겠구나.”
“난 한 번도 엄마를 엄마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난 언제나 엄마를 언니로 생각했어요.”
“그럼 난 참 못난 언니였구나.” -1권, 293쪽 


딸의 말에 노여워하기나 어처구니없어하기보다 이토록 유머스럽게 받아치며 자녀를 품어줄 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습니다. 어쩌면 십 대의 내 마음엔 이상적인 어머니의 전형처럼 새겨졌을지도 모르고요. 소피뿐인가요. 당신의 아버지 로렌스는 예술가였잖아요. 그런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바가 없지 않아 당신은,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며 만일 아버지라면 그 바다를 어떻게 그렸을까 생각해 보려 애썼다. 전체적으로 보면 푸른색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수천 가지의 서로 다른 빛이 모인 푸른색이었다. 좁고 반투명한 모래사장 너머 펼쳐진 바닷물은 남옥색이 깃든 비취색이었다. 바위와 해초 줄기 너머에 있는 바닷물은 또 짙은 남색이었다. 저 멀리, 작은 어선이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는 곳의 바닷물은 짙은 프러시안 블루였었다. 바람은 미미했지만 온 바다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2권, 251쪽 


이렇게 바다를 볼 수 있었겠지요. 한 사람이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좋은 것들만 배워 몸과 마음에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가끔 생각합니다.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런 태도를 몸에 배게 할 수 있다면 정말 근사할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따스하고 좋은 것들을 누렸던 어린 시절은 마치 1등 당첨된 복권과 같아서 아무나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었지만 당신은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누리는 행운을 가졌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부럽다 말하기에, 이후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면서 함께 힘들었습니다.  


2차 대전이 터지고 당신은 스스로는 당연한 순리처럼, 어른의 시선으로 보면 치기나 다름없는 마음으로 해군에 입대를 했죠. 그곳에서 후에 남편이 된 앰브로즈를 만났고요. 뱃속에 품은 아기를 위해 결혼이라는 카드를 고른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뻔히 예상하면서도 여전히 어린 낭만에 젖어 자신의 선택이 올바르리라 확신하는 당신을 다시금 보면서, 첫눈에 반하는 건 저런 것인가를 잠시 고민하며 읽어 내려갔던 열여섯의 나를 다시 보았습니다. 자고로 열여섯이란 이성보다는 감성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배하는 나이지요. 그러니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런 상황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요즘은 좀 다를 거예요. 저는 제가 열여섯이던 당시의 기준으로 말하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부모님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결혼에 이르렀고, 그들은 몹시도 행복했기 때문에 자신 역시 분명히 그럴 것이리라 믿은 순진한 사고방식이 안타까웠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납득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자라면서 보고 겪은 것을 준거로 삼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까요. 하지만 등기소에서 혼인신고를 하는 순간 당신은 어쩐지 이게 아닌 것 같다, 하는 불안의 단초를 심고 맙니다. 지금이라도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 순간에도 도무지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일지도요.  


그 자리에서라도 모든 것을 무르는 것이 좋았을까요.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당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해합니다. 자신들이 보기엔 분명히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아도, 사랑과 믿음으로 키운 자녀가 ‘괜찮다’고 확언하면 믿어주고 싶어지는 게 부모라는 걸, 지금의 나는 잘 압니다. 너무 잘 알아요. 로렌스와 소피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당신은 잘 해내고 싶었을 겁니다. 부모의 눈에 걱정과 불안이 어른거리는 게 보여도 잘 살아내는 걸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어쩌면 그건 당신의 오기였을 수도, 믿음에의 보답일 수도 있었겠어요. 아니, 잘못 말했어요. 당신은 오기를 부리는 타입은 아니니까요. 쭈욱 믿어준 부모에게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는 모습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알아요. 괜찮아요.  


비록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남편은 당신을 놔두고 다시 배를 탔고, 홀로 남은 당신은 낸시를 낳아 길렀지만요. 오히려 어쩌면 그리 떨어져 지내는 시간 동안 당신은 여러모로 냉정해질 수도 있었겠지요. 혹은, 죽음으로 이별해야 했어도 만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행복했다고 느낀 그 사람을 만나서 잠깐이라도 행복했겠죠. 


그러나 지금, 눈을 뜨고 완전히 깜깜하지는 않은 어둑어둑한 어둠을 바라보면서, 그 과거로 돌아가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마치 옛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또는 우연히 귀퉁이가 접힌 사진첩을 발견하여 페이지를 넘기다 세피아빛 스냅사진들이 전혀 희미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가장자리도 날카로운 선명한 사진들이 전과 다름없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느낌. -1권, 254쪽  


어떤 극極 가까이 가 닿았던 감정들은 세월에 빛에 바랠 리 없으니 이토록 선명하게 몇 번이고 현재로 틈입해 나를 도로 그 현장으로 데려다 놓을 수도 있음을 배웠었군요. 이제 황갈색으로 테두리가 짙어진 페이지들에 구불구불하게 밑줄을 그어 놓은 볼펜 선을 다시 따라 읽는 기분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렇게 훌륭하지도 못했어요. 어떨 때는 아주 성가셨죠.”
도리스의 얼굴에 눈물이 스러지고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축구를 하고 술에 취해 집에 오지 않나, 장화를 신고 침대에 곯아떨어지지 않나.”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지 마.”
소피가 타일렀다.
“그것들도 모두 그 사람의 일부이니까. 좋은 시절을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나쁜 시절을 기억하는 것도 괜찮아.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1권, 335쪽  


그리고 아버지. 모두들 죽었다. 죽은 지가 오래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처드가 갔다. 그가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녀는 노련하고 위대한 치료사―시간이라는 이름의 치료사가 마침내 자기 할 일을 완수해 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월을 수없이 건너뛴 지금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려도 더 이상 비통함과 슬픔의 소용돌이가 닥치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추억이라도 없었으면 자기 과거 인생이 얼마나 끔찍하게 공허했을 것인가. 사랑했고 그 사랑을 잃었던 것은 아주 사랑하지 않았던 것보다는 나아.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실이었다. -2권, 209쪽  


“하지만 사랑하던 곳을 떠나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잖아요. 오랫동안 이곳에 돌아오고 싶어 하셨는데, 또다시 떠나가니 말이에요.”
“난 행운아야. 두 장소에 내 마음을 두고 있으니, 어느 곳에 있든지 마음이 흡족하거든.”
“내년에 다시 오세요. 도리스 할머니하고 어니라는 분 집에 머물도록 하시고요. 그렇게 하면 그때까지 기대할 일이 생기잖아요. 아빠는 인생이란 뭔가 기대할 것이 없으면 살 가치가 없다고 하셨어요.” -2권, 292쪽



그러네요. 비록 흉터가 남을지라도 어떤 일들은 겪어보지도 못했던 것보다는 상흔을 안고 살지언정 온몸을 다해 통과해 보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신의 모든 선택을 응원하고 싶지만 하나만 원망할게요. 


그는 엄마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그가 세운 모든 계획과 품었던 희망은 열매 맺지 못하고 빈 조개껍질처럼 영원히 남았다. 그는 죽고 그녀는 단조롭게 인생을 이어나갔다. 앰브로즈에게 돌아가서 후회나 슬픔, 자신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은 느낄 겨를도 없는 전쟁 같은 나머지 일생을 살았다. 그녀의 자식들은 감쪽같이 몰랐다. 눈치조차 못 챘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무엇보다 이 사실이 슬프다. 엄마, 당신은 그에 대해서 말했어야 해요. 나한테 얘기했더라면, 난 이해했을 거예요. 난 듣고 싶어 했을 거예요. -2권, 386쪽  


올리비아는 당신이 가장 아꼈던 딸이었잖아요. 유산의 처리에 관한 문제조차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걸 올리비아에게는 모두 말했잖아요. 왜 말하지 않았어요. 올리비아가, 당신이 보관했던 리처드가 보냈던 편지들을 읽고 많이 울었어요. 알고 있었어요?


http://aladin.kr/p/bFTS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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