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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24. 2024

불사의 근원, 불멸의 매력

헨리 라이더 해거드, 그녀

호레이스 할리 님께.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들- 그러니까 레오와 조브, 빌랄리와 우스테인 -제가 읽었던 최초의 번역본에서는 ‘이스테’라는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하지만요-, 그리고 아샤와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싶네요. 저는 여러분을 열두 살에 처음 만났어요. 꽤 유명한 출판사에서 펴낸 MG 대상의-그 시절에는 ‘소년소녀 전집’ 등의 이름으로 흔히 발간되었는데,  여하간 그런 기획 전집 중에 들어 있었는데, 당시엔 「동굴의 여왕」이라는 제목이었답니다. 완역본으로 접한 뒤에야 원제가 「그녀 She」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얼마나 함축적이고, 강렬한 제목인지.


완역본을 다 읽은 뒤에야 제가 어린 시절 읽었던 것이 얼마나 심각한 다이제스트본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비스러운 이야기의 기승전결은 어린 여자아이의 마음에 아주 오래도록 남아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어째서냐면, 정말 우연히도 이 책을 발견하고 소개글을 읽는 순간 제 머릿속엔 거짓말처럼 ‘칼리쿨라테스’라는 이름이, 묻혀져 있던 백골이 드러나는 것처럼 떠올랐으니까요. 설마 하고 스크롤을 급히 내려 좀 더 자세한 책 소개를 읽는 순간, **년 만에 재회한 옛 친구를 만난 기쁨에 꽤 오래 환호했더랬죠. ‘칼리크라테스’라고, 조금 다른 발음으로 표기돼 있긴 했지만요, 나이를 먹었다고 오랜 친구를 못 알아볼 리는 없잖아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남자라면 누구나 영혼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미모와 권력을 모두 다 가진 여왕이 2000년의 세월 동안 자신이 목숨을 거두었던 남자의 환생을 기다리다 마침내 …(이하생략) 하는 이야기라니,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로그라인인가요. 물론 할리, 당신은


“어쨌든 나는 이 모든 것이 쓸데없는 망상이라고 믿는단다. 자연에는 우리가 거의 만나지 못하는 특이한 것들과 힘이 존재하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것들을 만났을 때, 이해하지 못하지. 그러나 나는 내 눈으로 목격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는 편이고, 죽음을 피하고 심지어 시간을 뛰어넘는 어떤 수단이 있다거나 아프리카 늪지 한가운데에 백인 마법사가 살고 있다고 절대로 믿지 않을 거야.” -67쪽


라고 지성인답게 이야기하지만 죄송하게도 당신은 불사의 여왕을 만나러 가는 모험에 발을 담그지 않을 수 없게 되죠. 그건 작가인 H.R.해거드가 미리 다 짜 놓은 판이라서요. 어쨌든 그런고로 여러분 -그러니까 할리, 당신과 아들처럼 키워온 친구의 아들인 레오, 충직한 하인 조브- 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모험 끝에 야만스러운 식인의 풍습을 간직한 아마해거 족과 조우하여 마침내 그들이 통치자로 모시는 여왕을 만나게 되죠. 그가 바로 2000년 전, 레오의 조상이었던 칼리크라테스를 사랑했고 죽였던 장본인인 불멸의 여왕 아샤입니다. 아샤는 이미 아내가 있었던 칼리크라테스에게 아내를 죽이고 자신에게 오라고 권유하지만 칼리크라테스는 단박에 거절하죠. 이에 분노한 아샤는 칼리크라테스를 죽이고 그가 언젠가 다시 태어나 자신을 만나러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광기 어린 결심을 하고요. 레오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레오가 바로 칼리크라테스의 환생이라 확신합니다.


근거 없는 미신적 존재로 여겼던 불사의 여왕을 맞닥뜨린 당신은 평정을 잃고 그녀에게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죠. 오래도록 미개한 종족과 함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아샤는 모처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기쁨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오, 그대는 라틴어도 할 줄 아는군요! 그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들으니 내 귀에 약간 낯설기는 하지만 그대의 억양은 로마인들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군요. (...) 내가 세상의 지식이라는 물에 손을 담근 학식 있는 사람을 발견한 듯합니다.” -202쪽


“나, 그래요, 아샤- 그게 내 이름입니다. 이방인이여- 내가 그대에게 말하나니, 나는 지금 사랑했던 이가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며, 그가 나를 찾아낼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그는 분명히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기에, 이곳, 바로 이곳에서만 그가 나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205쪽


지적인 대화의 끝에 당신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청하자 아샤는 경고하죠.


“베일을 벗은 내 모습을 본 남자는 그의 마음속에서 나를 지우지 못합니다.” -21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고집을 부려 기어코 아샤의 얼굴을 보기를 청했죠. 그 이후의 당신이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며 오래 전의 ‘소년소녀용 다이제스트판’에서는 이러한 적나라한 모습을 보지 못했던 저는 조금 웃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 대목은 어린 소년소녀가 -물론 그 당시의!- 읽기에는 상당히 “...” 한 뉘앙스가 꼭꼭 접혀 들어가 있는 것이, 과감하게 삭제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겠습니다.


하지만 슬프도다! 그녀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고 없고를 떠나, 스스로 판단컨대 그런 문제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내가, 대학의 연구원이자 여성혐오로 잘 알려진 내가, 존경받는 중년 남자인 내가 하얀 피부의 마법사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말도 안 돼, 진정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녀는 내게 분명히 경고했지만 나는 그걸 무시했다. 여자의 베일을 걷기 위해 남자를 자극한 치명적인 호기심에 저주를, 그 모습을 보도록 만든 자연적인 충동에 저주를! -219쪽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할리. 하지만요, 하지만요… 제가 지금 이런 말을 해봤자 뭐하겠나요, 이미 사달은 벌어졌는데. 여러분의 고난을 즐겁게(?) 읽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지만 참, 이때만큼은 한숨이 깊어지더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제가 읽었던 시기는 1980년 후반에서 1990년 초반의 어느 시기였는데 말입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때는 무려 그 시기로부터도 100여 년 전인 1887년임을 감안하면 이 어마어마한 만연체를 납득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만, 안타깝게도 2024년 지금 이곳에서 복문과 만연체는 거의 시대의 역적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아샤는 여러분보다 훨씬 더 옛날(!) 사람이니, 한 페이지가 가득 차고 넘치도록 말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물론 아샤에 비해 간결하게 말하는 당신도 종종 한 문단에 가깝게 발언하곤 하시더군요), 고색창연하기 짝이 없는 그 대사들이… 현대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게 그런 안타까운 심정으로 아샤의 말들을 들어주려 노력했거든요. 그런데, 엔간한 장광설에 익숙한 저조차도 종종 책을 내려놓고 목을 잠깐씩 뒤로 젖히는 일이 잦았답니다. 그냥, 그랬다고요.


“미래에 무엇이 벌어질지 아는 자는 미래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인간의 끝인 먼지로부터도 도망치려고 안달하지 마십시오.” -303쪽


라고 아샤는 말하더군요. 저는 미래를 모릅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다행일까요? 그건 그렇고, 길고 복잡한 문장이 기꺼이 다시 환영받을 시기가 오긴 올까요? 모르겠습니다. 소위 벽돌이라고 부르는 문장을 저는 꽤 좋아하는데 말이죠. 아무튼, 자꾸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가려는데 말이죠.


어쨌거나 사실 제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요, 할리.

어릴 때는 몰라봤는데 말입니다.

아샤는 칼리크라테스의 환생을 쭉 기다려왔노라 말하고 그의 환생이 틀림없을 레오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죠. 그런데 아샤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건 레오가 아니었어요. 아샤가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보여주고 싶어한 건, 감상을 듣고 싶어한 건 당신입니다. 대화하면서 즐거워한 상대는 레오가 아니라 당신이었어요. 아샤가 믿은 사랑이란, 철부지 소녀가 떠올릴 법한 사랑의 추상성이 아니었을까 불현듯 생각하게 된 거죠.


“어둠 속에서 그를 밝게 비춰주는 등불에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다고 해도, 사람은 반드시 그게 별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등불을 내버립니다.” -349쪽


아샤의 이 말이 길게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어쩌면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삶으로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모험과 악몽이 끝난 지도 오래되었지만,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평안하세요, 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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