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상처, 혹은 그런 감정
“네, 편집자님!”
정류장에 거의 도착해 간다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허둥지둥 뛰어가던 유진이 입술로만 들리지 않는 거친 말을 내뱉으며 어찌 됐건 최대한 상냥한 음성을 내려 애썼다. 어쨌든 먹고사는 일을 해결해 주는 일감을 주는 갑 님이 아니신가. 그것도 최종본을 넘긴 지 몇 달이 되어가도록 입금해 줄 생각을 않는 갑의 ㄱ자도 아까운 클라이언트들을 생각하면 지금 통화하고 있는 상대에게는 넙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네. 그건 러프본이어서 아직 수정 가능한 거 맞죠. 그럼요. 하지만 컨펌해 주신 뒤에 다시 수정 요구하시면 그건 좀 어렵고요... 네, 네.”
유진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려는 가방끈을 추켜올리며 힘겹게 교통카드를 리더기에 찍었다. 카드를 인식하는 삑- 하는 소리가 그거 아니야, 그런 요구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유진의 내적 비명을 대신 외쳐주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네... 말씀하시는 것은 알겠고요. 그래도 디테일 들어가기 시작한 이후에 말씀 바꾸시면 저도 힘들다는 건 좀 알아주셨으면... 네. 알겠습니다.”
간신히 통화가 끝났다. 유진이 핸드폰 액정을 노려보다가 가방 안으로 거칠게 떨어뜨렸다.
‘돈을 제때 주는 건 굉장히 고맙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야... 아니 근데, 일을 해서 완성본을 넘겨주면 바로 작업료를 입금해 주는 당연한 일에 내가 왜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고마워해야 돼?’
개인적인 불만으로 시작한 잡념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갔다. 어느 정도로인가 하면, 그 생각의 부피에 함몰되어 현실의 일을 모두 잊을 만큼의 수준으로.
‘에이 씨-’
내려야 하는 정류장을 지나칠 뻔한 유진이 씨근거리며 올라탈 때와 비슷하게 우당탕거리며 허둥지둥 내렸다.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이혼한 언니가 한 주 동안 종일반에 맡겨둔 조카의 하원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늦게까지 남아있는 아이들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최후의 1인이 되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다. 그러나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유진이 어린이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가방까지 메고 갈 준비를 다 마친 서라가 우울하게 현관 옆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서라야, 놀고 있지 왜 여기서...”
민망해하는 얼굴로 선생님이 설명했다.
“오늘은 이모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 자기가 먼저 나와서 기다려줘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늦어서 화났나 봐요.”
“잘 달래 주시면 금방 풀릴 거예요.”
‘글쎄, 과연 그럴까요...’
입술을 뾰족하게 모은 채 눈을 뱀처럼 뜬 서라를 보며 유진이 한숨을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서라가 썰렁한 분위기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딱 한 마디를 했다. 저녁 메뉴 주문이었다.
“이모, 나 볶음밥.”
“계란 볶음밥? 아니면 베이컨?”
지은 죄가 있었으니 유진은 조카의 눈치를 슬슬 살피는 데 바빴다. 서라가 새초롬하게 베이컨, 하고 중얼거리고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위 인형을 끌어안고 방으로 쌩 들어가 버렸다. 평소 서라는 유진이 해준 음식을 몹시도 좋아했으므로, 유진은 서라가 좋아하는 메뉴로 잃어버린 인심을 회복하겠노라 결의를 단단히 했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기대를 배반하는 법.
서라가 시큰둥하게 밥그릇을 내려다봤다.
“이게 뭐야?”
유진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뭐긴... 너 베이컨 볶음밥 먹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나 계란 볶음밥.”
“배고프잖아, 서라야. 이거 먹고 이모랑 그림 그리고 놀자, 응?”
유진이 간절하게 설득하듯 말해 보았으나 잠깐 눈썹이 움찔했을 뿐, 서라는 뭔가를 꾹 견디는 얼굴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계란 볶음밥.”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유진이었다. 유진이 식어가고 있는 베이컨 볶음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알겠어. 다시 해줄게.”
그러나 제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확실하게 가르쳐주겠다는 다섯 살의 결심은 실로 놀라웠고 유진은 어린아이가 알고 있는 감정의 가짓수는 적을지언정 그 강도가 성인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원치 않게 학습하게 되었다.
“계란 싫어졌어. 그냥 베이컨 볶음밥.”
유진은 결국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을 갈무리하는 데에 실패했다. 멜라민 그릇을 탕 소리가 나도록 식탁에 내려놓으며 유진은 서라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이서라! 너 지금 이모랑 싸우자는 거야?”
누가 보면 외려 유진더러 서른 살짜리가 다섯 살짜리 꼬맹이와 싸울 생각이냐고 물었겠지만 유진은 사뭇 진지했다. 고개를 모로 꼬고 있던 서라가 뾰로통하게 내뱉었다.
“베이컨 볶음밥.”
그제야 유진은 깨달았다. 이것이 다섯 살짜리가 제 나름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서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라는 사실을. 기가 막히다 말고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유진은 가까스로 진정했다. 유진이 무릎을 꿇고 가만히 서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서라야, 화났어? 이모가 늦게 가서 속상했어?”
뜻밖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숨기고 있던 마음이 건드려진 순간 서라의 입가가 씰룩거리더니 얼마 못 가 아이는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서라가 서럽게 울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혼자, 싫어. 혼자, 있으면, 나쁜 생각... 들어.”
아, 하고 감탄사를 터뜨린 유진이 서라의 머리를 가슴에 당겨 안았다. 자신이 조카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잠시 서라가 진정하도록 그대로 있었던 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라가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가끔 모르고 그럴 때가 있어. 내가 기억하기 싫은 걸 기억하게 하는 행동이나 말을 할 때가 있어. 오늘처럼.”
“나쁜 거야.”
서라가 진지하게 촌평했다. 고개를 끄덕여준 유진이 말을 이었다.
“맞아. 나쁘지. 근데, 알고 그러면 정말 나쁜데, 미처 모르고 실수로 그럴 때도 있거든. 방금 이모처럼. 그럴 때는 왜 화났는지 말해주고, 사과하면 용서해 줘. 모르고 그런 거니까.”
“이모도 사과할 거야?”
“응. 미안해, 이모가 모르고 서라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걸 기억하게 해 버렸어. 정말 미안.”
“알았어.”
“뭐 먹을래?”
“베이컨.”
“그럼 이모가 계란 먹어야겠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이 얼마쯤 옹졸한 인간이라 생각하는 유진은 혼잣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나중에 너 크면 사과받아낼 거야, 이서라. 너 지금 내 클라이언트가 나한테 억지 쓰는 거하고 똑같은 진상짓 한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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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Frida Lannerströ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