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엽편 | 심오하다

알지 못했던 깊이와 신비스러움이 느껴지는

by 담화

“......”


마치 흐르는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렸을 때처럼, 마지막 마디의 음이 점차 공기 중에 희석되어 갔다. 제 숨소리조차 섞여드는 것도 싫은 결벽주의자 같은 태도로, 활과 현이 마침내 이별을 고하고 떨어지는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음을 놓아주는 속도를 신중하게 조절하던 니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심각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쉽네.”

“네가 듣기에도 그렇지?”

“일단은.”


파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도전, 그리고 실패, 또 도전, 실패. 무수히 계속 실패하고 또 도전하는 거지.”

“으아, 좀 너답다.”

“나답다고?”


파랑이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인 것처럼 눈을 치뜬 채 니나를 의문스럽게 쳐다보았다. 니나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과장스럽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몰랐어? 뭐가 너다운지?”

“그런 거 평소에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아서. 그러고 보니 뭐가 뭐 답다고 하는 거, 스스로에겐 좀 안 쓰는 표현 아닌가.”

“그렇지, 아무래도.”


파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하자마자 니나가 슬쩍 고개를 90도로 기울여 비딱하게 시선을 맞추면서 장난치듯 말을 받았다.


“근데 있잖아- 악기를 만드는 나무도 품종과 자라난 환경에 따라 자기 다운 소리를 갖는데, 사람은 더 그러면 그랬지 덜하진 않을 것 같아.”


니나가 어루만지는 바이올린을 유심히 바라보던 파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 하긴. 바이올린도 확실히...”

“그치, 사실 현을 문지른다고 해서 뭐 대단한 소리가 나겠어? 그런데 나무로 만든 울림판을 갖다 대서 소리를 키우는 원리잖아. 거기엔 온갖 물리학이 끼어들어 앉아 있겠지만 그런 건 다 빼고, 음... 크레모나 들어 봤지?”

“음악 안 하는 사람도 과르네리나 스트라디바리는 다 알지 않나?”


눈코입을 진지하게 모은 채 니나가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치, 그치. 근데 그 사람들이 좋아한 나무가 있었어. 사랑했다고 해도 될까, 이 경우엔? 스프루스라고 하는 나무. 그들이 추구하는 어떤 이상향에 가까운 소리를 내줄 수 있는 최적의 재료였을 거야. 그런데 있지, 내 생각엔.”


둘은 함께 무대에 선 뒤로 제법 친해져서 때때로 종종 여유시간을 같이 보낼 때가 있었다. 학생들이 마음대로 오해하며 수군대는 것과는 완전히 관계없이 100% 음악 이야기만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오늘도 새로 연습하는 곡을 봐 달라며 파랑을 불러내 놓고서는 결국 이렇게 한참을 재잘거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파랑은 니나가 그러는 이유를 대강 짐작했다. 욕심껏 대곡에 도전해 놓고는, 역시나 잘 풀리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마음을 풀고 싶었던 것이겠거니, 하고. 무엇보다 지도교수가 지금 니나가 무엇을 몰래 연습하고 있는지를 알면 불벼락을 내릴 것이 뻔했다.


“파랑, 블라우. 미스터 블루. 내 말 듣고 있습니까, 지금.”

“아, 미안. 스프루스 얘기까진 확실히 들었어.”


파랑의 솔직한 사과에 기가 찬 웃음을 내뱉은 니나가 지레 인상을 쓴 뒤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그 소리의 본질은 결국 스프루스의 품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 그러니까 스프루스다움과 아주아주 관계가 깊은 거지.”

“나무하고 품성이 어울리는 말이었나.”

“너 오늘 정말 이럴래?”


제법 매섭게 주먹을 들어 올리는 니나를 피해 몸을 휙 꺾은 파랑이 푸하핫,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두 손바닥을 붙여서 비는 시늉을 했다.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진지하게 경청하겠습니다, 니나 일리니치나. 그래서요?”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듯이 팔짱을 낀 니나가 그대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말을 이었다.


“그 시기의 악기들이 대단했던 건, 특별한 시기를 몸으로 견뎌낸 나무들 덕분이 컸을 거야. 원래도 척박하고 서늘한 환경을 견디며 자라는 게 체화돼 있었겠지만. 소빙하기라니, 상상이 돼?”

“엄청 추웠겠지.”

“그러니까아. 안 그래도 날씨 탓에 천천히 자라는 애들인데, 그 추운 날씨엔 오죽했겠어. 안 그래도 더딘 성장이 더더욱 느려졌겠지. 그럼 어떻게 되게? 그 밀도는, 촘촘함은 상상할 수도 없는 거지. 모두가 감탄하는 견고하고 믿음직한 소리를 내는 악기는 그렇게 만들어졌어. 그걸 흉내 내려고 아무리 지금 제작자들이 온갖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지만, 시간과 자연이 선물한 놀라운 기적을 어떻게 흉내를 낸단 말야, 인간이.”

“그걸 품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너는?”


파랑을 돌아보는 니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파랑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니나에게서 뭔가가 빛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벌써 두 번째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당연하지. 품성은 발산하면서 만드는 게 아니야.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내면화하면서 빚어가는 거지. 난 음악가의 소리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응?”

“우리의 인격을 잘 배양해 보자, 이 말이지. 야, 영광인 줄 알아라. 내가 나의 이 오묘한 인생철학을 남에게 설파한 건 네가 처음이라고.”

“왜 나한테 했는데?”


니나가 가르쳐 줄까, 말까 약 올리는 것 같이 혀를 쏙 내밀어 보이더니 바이올린을 다시 턱 밑에 끼우며 천천히 대답했다.


“예전에 무대에 올라가던 날, 네 악보에서 그걸 봤거든. 내가 사랑하는 스프루스적인 성향을. 그래서 말해 준 거야. 너하고 친구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래서고.”





[표제어_심오하다/모티브_J. S. Bach Chaconne in D minor, BWV1004]

사진: UnsplashAaron Bu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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