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헤아려 보고
세상에는 어떤 포지션에 놓여있을 때 경험하기 힘든 일들이 있다. 고등학생이 날 밝을 때 하교하는 것처럼. 그러나 몹시 정당하게 그러나 축 처진 기분으로 점심때를 전후해서 하교할 수 있는 날이 있는데,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가채점 해 봤어?”
“... 묻지 마...”
윤해랑이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대꾸했다. 중간고사라는 절벽은 도대체 얼마나 높았던 건지, 한참 전에 밀려 떨어진 것 같은데 기분은 끝도 없이 추락했다. 그 마음도 모르고 발에 걷어차이는 낙엽은 공중에 붕붕 잘도 떴다 조심조심 내려앉았다. 옆에 와서 함께 계단을 내려가는 민서가 한숨을 쉬었다.
“기분도 그런데 밥이나 먹고 갈래?”
“... 마라탕?”
해랑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동의를 표했다. 그래, 등급 떨어지는 건 떨어지는 거고. 기분도 허한데 속까지 허하면 더 서럽지. 엄청나게 맛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저 학교 가까운 곳에 있는 마라탕집이라는 이유로 장사가 잘 되는 가게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던 해랑과 민서가 주황빛이 도는 다갈색 낙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선명한 빨간색의 뭔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추어 섰다.
“저거 뭐지?”
“몰라. 가보지 뭐.”
조심조심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뜻밖에도 양말이었다. 그것도 손가락 세 개, 세 마디를 억지로 쑤셔 넣으면 꽉 찰 것 같은 사이즈의, 빨간 양말목 밑에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양말. 해랑과 민서가 순간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똑같이 외쳤다.
“아기양말이다!”
해랑이 먼저 손을 뻗어 과연 이게 누구 발에 들어가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자그마한 양말 한 짝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어찌저찌 양말은 신어도 신발을 신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아기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양말 바닥은 새것처럼 깨끗했고 동물 발바닥 모양의 도톰한 미끄럼방지 고무가 붙어 있었다. 주변에서 아기를 볼 기회가 없으니 아기 양말이라고 볼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뭘 먹으러 가자던 것도 있고 이마를 맞댄 채 해랑과 민서는 아기 양말을 열심히 관찰했다.
“야, 진짜 귀엽다. 이런 걸 신는단 말이지, 애기들이.”
“그런데 발이 정말 요만한가? 사람 발이 이렇게 작을 수가 있나?”
“뭔 소리세요, 그럼 니 발은 날 때부터 250이었냐.”
티격태격 온갖 잡담을 늘어놓다가 한참만에 두 사람은 멍하니 마주 보며 결정적인 질문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애기 엄마가 떨어뜨리셨나...”
“손에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신겨놓은 걸 어떻게 떨어뜨려. 애기 발에서 벗겨졌나 보지.”
“양말이 그렇게 줄줄 흘러내리는 거던가...”
손바닥의 1/3 크기밖에 안 될 것 같은 쬐그만 양말 한 짝을 쥔 채로 해랑이 우거지상을 했다.
“어떡하지? 그냥 여기다 놓고 가면 찾으려 올까?”
“몰라... 근데 애기 발 시렵지 않을까. 바람 차가워졌는데. 그거 뭐 있었잖아. 체온조절능력이 떨어져서... 암튼, 뭐 그래서 이거 빨리 찾으셔야 될 텐데.”
거하게 말아먹은 중간고사 성적도, 마라탕 먹으러 갈 생각도 완전히 잊어버린 둘은 막상 뭘 어떻게 하지는 못하면서도 차마 뽀얗고 예쁘장한 아기 양말 한 짝을 그대로 바닥에 다시 떨구고 가던 길 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다 문득 멀찍이 앞을 내다본 민서가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어, 야!”
“뭔데, 왜?”
“저거, 저거!”
민서가 해랑의 팔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기며 손가락질 한 인도 한가운데, 그사이에 낯익어버린 똑같은 색깔과 무늬를 가진 양말 한 짝이 마저 떨어져 있었다. 환호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민서가 냅다 달려가 조그만 양말을 마저 주워 올렸다. 민서가 하는 행동을 보고 있던 해랑이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방법이 있어!”
“뭔데?”
“가만있어봐 봐.”
해랑이 가방을 마구 뒤져 L자 파일을 꺼내 그 안에 꽂혀 있던 프린트물을 모조리 털어냈다. 그걸 보고 있던 민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야, 윤해랑. 너 설마.”
해랑이 파일 안에 양말 한 켤레를 고이 집어넣고 필통을 뒤져 네임펜을 꺼냈다.
<오후 한 시쯤 빨갛고 파란 줄무늬가 있는 아기 양말을 주웠어요. 아기 발이 많이 춥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꼭 찾아가셨으면 좋겠어요!>
곁에 바짝 붙어 해랑이 쓰는 문장을 들여다보던 민서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적당히 가지가 벌어진 은행나무를 가리켰다.
“여기다 꽉 맞게 끼워놓으면 될 것 같아. 어, 그렇게. 글씨 보이게...”
“됐... 나?”
“어, 됐어.”
은행나무에 폭 싸 안긴 파일과 그 안에 웅크리고 있을 양말 한 켤레가, 빨리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라며 해랑과 민서는 한결 산뜻해진 기분으로 뒤돌아섰다.
[표제어_어림짐작/모티브_에우게니 M. 라쵸프 「장갑」]